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피가로

지하에 묻혀있는 산의 늪은 마법사의 저주에 이끌리듯 이동하고 있어.

이 주변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게 그 증거야.

마을의 주거구역에까지 영향이 미치면 큰일이야. 늦기 전에 손을 써두는 게 좋을거라 생각해.

 

레녹스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망설이는 와중, 레녹스가 무겁게 묻는다.

 

레녹스

...그건, 이 진료소를 없앤다는 뜻입니까...?

 

피가로

그렇게 되겠네.

 

현자

그럴수가....

 

피가로

벌써 여기저기서 피해가 나오고 있어. 우물쭈물해 있을 시간이 없으니까 말야.

 

파우스트・레녹스

.......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침묵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진료소의 미래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훈훈한 실내 공기가 확 차가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피가로가 하는 말은 옳을지도 모른다. 이 이상으로 피해가 넓어지기 전에 이변을 방지하는 것이 마땅할 터.

 

현자

(...하지만)

 

이 풍경을 반갑다며 기뻐하던 루틸과, 언젠가 이 곳에서 피가로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환하게 웃으며 꿈을 이야기하던 미틸.

그리고 피가로를 의지하여 방문한 부부의 얼굴. 그들이 피가로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웃음꽃이 피던 모습이 눈꺼풀 뒷편에 떠오른다.

아주 짧은 체류 중에도 이곳이 둘도 없는 장소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현자

(그런 소중한 장소를 없앤다니...)

 

정말 괜찮을까.

이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결정해버리면 후회하지 않을까.

 

피가로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 진료소를 포기할 뿐인 거야.

 

미틸

잠시만요!

 

루틸

어떻게 된 건가요!?

 

레녹스

미틸, 루틸.

 

파우스트

너희들, 벌써 돌아온 건가?

 

히스클리프

죄송해요. 시노가 도중에 배가 고프다고 해서...

 

시노

갑자기 생각났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게.

 

네로

것보다 방금 그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야? 진료소를 포기한다니...

 

피가로

말 그대로야. 진료소는 처분하기로 했어.

 

미틸

그럴수가, 대체 왜...

 

피가로

이변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나도 이 진료소에는 애착이 있고 추억도 아주 많아.

그래도 이대로 있다간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슬퍼할지도 몰라.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하는 일이란다.

 

미틸

어, 어떻게든 없애지 않는 건 안 되나요? 여기는 저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추억이 아주 많은데...

 

미틸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동요가 느껴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피가로가 극히 차분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대답한다.

 

피가로

없애지 않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위험이 동반되고 제법 손이 많이 가.

여기는 미틸의 휴식도 겸해서 온 거니까 말이야. 의뢰는 빨리 끝내고 다같이 느긋하게 쉬고 싶잖아.

 

미틸

피가로 선생님...

 

피가로의 말을 듣고 미틸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피가로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마법사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을 없앤다는 것은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진료소도 오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잃거나 얻은 것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미틸에게 있어서는 어릴 적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장소이고, 방금 전까지도 다같이 평화롭게 지내던 곳이다.

그런 장소를 갑자기 없앤다고 들으면 망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의 눈동자에서 슬픔과 반발심이 느껴졌다.

 

미틸

게다가... 제가 장래에 약사가 되면 여기서 일하게 해주신다고, 아까...

 

피가로

...미틸. 너는 현명하니까 알겠지?

 

미틸

.......

모르겠어요.

 

무척 슬픈 듯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미틸은 고개를 저었다.

 

미틸

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알고싶지 않아요...!

 

시노・히스클리프

미틸!

 

루틸

잠깐만, 미틸.

죄송해요, 진료소에 관한 건 선생님께서 결정하실 일인데. 하지만 미틸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미틸을 쫓아 세 명이 달려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잠시 동안 진료소는 조용해졌다.

 

피가로

...납득하지 못한 걸까. 역시 남쪽의 젊은 마법사는 토지에 집착이 있네.

 

레녹스

지금은 당신도 남쪽의 마법사입니다.

 

레녹스가 낮은 목소리로 던졌다. 한숨을 내쉬는 듯한 태도에 피가로가 천천히 그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레녹스

저도 미틸과 같은 의견입니다.

 

현자

레녹스...

 

피가로

뭐야. 레녹스까지 반대하는 거야?

 

레녹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나서 포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요.

 

피가로

시간이 있다면 쓸데없는 일이나 수고가 들어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고.

다소의 희생은 따르기 마련이야. 수수방관한 채 나무를 시들게 할 바에, 난 차라리 병든 가지를 꺾을거야.

 

레녹스

가지도 아픔을 느낍니다. 그 가지에 앉아 쉬는 작은 새들도 있을 거고요.

이런 일을 반복하니까 잃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게 아닙니까. 저는 당신처럼 딱 잘라버리진 못합니다.

 

레녹스의 목소리는 조용하고도 반항적이었다.

 

피가로

너도 제법 잘 말하는구나.

 

그에 비해 피가로는 싫증난 왕자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가 흐른다.

 

네로

...저기 말야, 잘은 모르겠지만 수단은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거야?

 

네로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파우스트에게로 모인다.

레녹스는 파우스트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레녹스

파우스트 님. 달리 저주를 없앨 방법은 없을까요.

 

조금 생각에 잠긴 뒤, 파우스트는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

.......

없는 건 아냐.

우선 당시 산의 늪과 그 마법사를 묻은 현장으로 가서, 그 토지를 파내고 원흉이 된 물건을 찾는다.

피가로는 무언가에 원한이 깃들었다고 말했지만, 아마 마법사가 지녔던 물건이나 마도구가 원인이겠지. 별로 좋은 물건은 아닐거다.

주물이 된 그걸 찾아서 정화하면 이변을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몰라.

 

현자

정말인가요...!?

 

희망이 보여 그 순간 가슴이 북받쳤다. 하지만 피가로의 한숨이 그것을 싹 지워버렸다.

 

피가로

지상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산의 늪은 상당히 깊은 지하에 묻었어. 주물을 찾는다면 엄청난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해.

그럴 동안에도 저주가 산의 늪을 이끌고 마을로 오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

보아하니 앞으로 남은 건 이틀 정도야.

주물이 나올 가능성은 낮고, 애초에 발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레녹스

.......

 

모두에게 설명하면서도 피가로의 눈은 레녹스를 향하고 있다.

 

현자

(...설마 이 두 사람이 대립하다니...)

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침대에 눕혀도 아기는 불에 데인 것처럼 계속 울었다.

 

피가로

좋아좋아. 착하지.

 

피가로는 아기를 달래면서 목구멍과 눈의 색을 관찰하고 상태를 확인했다.

 

피가로

...응. 어디가 아픈 건 아니야.

 

피가로는 작은 몸에 손을 대고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흐느껴 울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져갔다.

 

피가로

조금 나쁜 게 들어간 것 같아. 회복 마법을 걸어뒀으니 금방 좋아질거야.

오늘 밤 푹 자고나면 내일 아침에는 분명 건강해져 있을거야.

 

남성

정말인가요!?

 

여성

아아, 다행이다...!

 

눈물을 흘리며 부부는 아이를 안아올렸다.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인다.

 

여성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 아이에게 큰 일이 생겼으면 어쩌지 싶어서... 

 

피가로

괜찮아. 쉽게 지지 않는 강한 애야.

그렇지? 아가씨.

 

아기의 코를 상냥하게 쿡 찔렀다. 아기가 웃자 부부도 긴장이 풀린 것인지 따라 웃었다.

 

남성

맞다, 피가로 선생님. 일이 끝나시면 꼭 저희 마을에 들러주세요.

마을 녀석들을 불러서 환영해드릴테니까요.

 

여성

맞아요. 꼭 대접하게 해주세요.

제 어머니도 선생님께 진료 받고나서 복통이 좋아졌다고, 저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세요. 선생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세요.

 

피가로

아하하. 고마워.

다음에 천천히 들를게.

 

왔을 때는 불안해 보였던 부부는 이제 완전히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이를 안은 손에서도 안도감이 느껴진다.

피가로를 신뢰하는 그 모습을 눈앞에 두고, 나는 미틸의 말을 떠올렸다.

 

현자

(...든든하고 소중한 장소...)

 

오늘뿐만 아니라 부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피가로에게 도움을 받아온 것이겠지.

그것은 분명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현자

(이곳은 모두에게 있어서 안심을 주는 소중한 장소구나...)

 

부부가 진료소를 떠나고 드디어 진정된 무렵.

 

피가로

그럼 본격적으로 조사를 진행해볼까.

 

미틸

피가로 선생님, 뭘 하면 될까요?

 

루틸

저희, 뭐든 할게요!

 

피가로

응. 두 사람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

그리고 시노와 히스클리프와 네로에게도.

다섯명은 우선 이 주변을 날아서 뭔가 눈에 띄는 이변이 없는지 확인해줬으면 좋겠어. 그 동안 우리도 조금 조사하고 싶은게 있어서.

 

루틸・미틸・히스클리프

네!

 

시노・네로

알겠어.

 

현자

여러분, 조심하세요.

 

루틸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다섯명이 타다닥 밖으로 나가고 진료소의 문이 닫힌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던 것처럼 파우스트가 말을 꺼냈다.

 

파우스트

...너, 벌써 이 이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챈 거 아닌가?

 

현자

어... 그런가요?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피가로

짐작일 뿐이지만, 이 지진의 원인은 산의 늪이야.

 

레녹스

...산의 늪?

 

피가로

풀과 나무는 물론, 닿는 건 뭐든 녹여버리는 귀찮은 늪이야. 남쪽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생물에게 맹독 그 자체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지반은 안정되지 않고 다양한 재해를 일으켜. 처치 곤란하단 말이지.

 

현자

그런 무서운 늪이 있다는 건가요...?

 

피가로

정확하게는 있었다, 라고 할까. 아주 먼 옛날에 덮어버렸으니까.

개척하기 시작했던 무렵의 오래된 이야기인데, 덮어버리기 전, 산의 늪 주변에는 다양한 이변이 일어났었어.

커다란 지진이 자주 일어나거나, 지면에 갑자기 구멍이 뚫리거나 말이야.

 

파우스트

이번 이변과 거의 똑같군.

 

피가로

그래.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매립한 늪이 이제와서 장난을 치고 있어.

 

현자

.......

 

무의식 중에 시선을 발밑으로 떨어뜨린다. 땅 밑에 묻힌 꺼림칙한 늪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레녹스

...피가로 선생님. 그런 위험한 장소에 이 진료소를 세운 겁니까?

 

피가로

설마!

 

섭섭하다고 말하듯이 피가로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피가로

산의 늪이 있었던 건 여기가 아니야. 아주 먼, 사람이 사는 곳에서 떨어진 장소야.

애초에 생물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토지였지만 그냥 놔두는 것도 위험하니까. 지하 깊숙히 묻고 봉쇄한거지.

그래서 지금은 안전하고,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진료소 주변까지 영향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어.

 

파우스트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이변이 발생하고 있어. 짚이는 게 있을텐데.

 

아주 잠깐 난처한 듯이 피가로는 팔꿈치를 긁었다.

 

피가로

나에 대한 복수이려나.

 

레녹스

복수, 말인가요.

 

피가로

그래. 당시 사람을 속이거나, 마법으로 도둑질을 하는 마음가짐이 나쁜 마법사가 있어서 말이지.

돌로 만들어서 늪과 함께 묻어버렸어. 한꺼번에 처리했다고나 할까.

 

피가로의 말에 나는 철렁했다.

 

현자

처, 처리?

 

시원스러운 말투는 주눅 든 기색도 없다.

 

현자

(평소 분위기로 보면 금방 잊어버렸을 것 같은데...)

 

피가로는 수천 년을 살아온 마법사다. 낙숫물이 목덜미에 떨어진 것처럼 오싹한 감각이 들었다.

 

레녹스

그럼 이번 이변은 그 마법사가 일으켰다는 건가요.

 

피가로

그렇다고 생각해. 방아쇠는, 아마 〈거대한 재앙〉이겠지.

저 달의 영향으로 마법사가 남긴 원한이 무언가에 깃들어 산의 늪의 정령과 결합된 게 아닐까.

약한 만큼, 집념이 강한 남자였으니까 말이야.

자아 같은 건 벌써 사라졌을텐데도, 나를 찾으러 지맥을 기어다니고 이 진료소 지하까지 이동해 온 거겠지.

정말이지, 한결같은 놈이야.

 

그렇게 말하고 피가로는 주문을 외웠다.

 

피가로

《폿시데오》

 

현자

...우왓?

 

또다시 커다랗게 지면이 흔들렸다.

동시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현자

(...어? 뭐지...?)

 

레녹스

이건...

 

갑자기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음산한 소리가 울리고, 무심코 귀를 막았다.

온몸에 휘감기는듯한 불안감.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안 좋아진다.

실제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소리에서 강한 원망과 증오가 느껴졌다.

괴로워하고 발버둥쳐라... 뭐든 빼앗아주겠다, 라고.

 

피가로

미안해, 무섭게해서.

 

딱, 하고 피가로의 손가락이 울린다.

그러자 검은 안개도, 원망하던 느낌도 꿈처럼 확 사라졌다.

 

현자

...방금 그건...

 

파우스트

아까 느낀 저주의 기운은 이거였나...

 

레녹스

파우스트 님.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파우스트

왠지 불온함을 느끼고 있던 정도다. 이 남자처럼 뭐든 알고있는 건 아냐.

 

파우스트는 힐끗 피가로를 보았다.

 

파우스트

거기까지 알고 있었으면 해결책도 있는 거겠지.

 

피가로

그렇네...

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집념의 대상은 나야. 나와 토지의 결합이 강한 걸 매개로 하면 금방이라도 소멸시킬 수 있어.

즉, 이 진료소야.

 

현자

어...

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피가로

자, 도착이야. 다들 고생했어.

 

현자

여기가 피가로의 진료소...

 

커다란 호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러셀 호수는 호반을 중심으로 마을이 군집해 있는 것 같았다.

주민들의 집들이 호수 주변에 모여있었다.

피가로의 진료소는 그 호수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소박한 모습은 친숙해지기 쉬운 분위기가 있다.

 

미틸

왠지 오랜만에 온 기분이에요.

 

루틸

최근엔 올 기회가 없었지. 그래도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그리운 풍경에 둘러싸여 루틸과 미틸은 기쁜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레녹스도 표정이 부드럽다.

 

현자

레녹스도 역시 반가운 기분인가요?

 

레녹스

그렇군요. 저도 오는 건 오랜만이라.

 

시노

호수랑 가깝네. 나쁘지 않아.

 

히스클리프

경치가 아름다워. 몸을 돌보기엔 딱 좋은 환경인 것 같아.

 

루틸

무척 예쁜 곳이죠? 피가로 선생님의 진료소에는 옛날부터 쭉 신세를 지고 있어요.

저희뿐만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피가로 선생님을 의지하고 있거든요.

 

미틸

약을 받거나, 다친 곳을 봐주시거나, 아플 때 상담하거나...

모두에게 무척 든든하고 소중한 장소예요.

 

피가로

그렇게 칭찬하면 부끄러운걸.

 

피가로가 바라보자, 미틸과 루틸은 웃으며 가슴을 폈다.

그것은 고향인 구름의 거리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보인 표정과 같은 것이었다. 자랑스럽고 마음이 편안한 듯했다.

 

현자

(미틸과 루틸에게 있어서 이곳은 또 하나의 집 같은 곳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직후, 현기증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현자

...윽!

 

시노・미틸・히스클리프

!?

 

네로

우왓?

 

파우스트

지진인가...!

 

진동은 생각보다 컸다. 몸서리 치는 지면에 몸이 휘둘린다.

갑작스러웠기 때문인지 다들 크게 휘청거렸다. 나도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 같았지만 레녹스가 받쳐주었다.

 

레녹스

현자 님, 저를 잡으세요.

 

현자

가, 감사합니다...!

 

곧 진동은 멎었다. 다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루틸・미틸

깜짝 놀랐어...!

 

시노

히스, 괜찮아!?

 

히스클리프

으, 응. 괜찮아...!

 

파우스트

...지진이 빈발한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군.

 

네로

도착하자마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네. 거기다 꽤 크잖아.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야기를 듣기만 해서는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그 무서움을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직접 이변의 심각함을 실감했다.

 

레녹스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면 피해가 상당할 것 같습니다.

 

루틸

이미 무너진 건물도 있다고 해요. 이대로 지진이 계속되면 진료소도 무사하지 못할지도...

 

미틸

그럴수가... 빨리 어떻게든 해야겠어요.

이 이상 큰 일로 번지기 전에 저희가 이변을 막죠!

 

루틸

응! 모두의 소중한 장소는 우리가 지켜야지.

 

친숙한 토지라는 것도 있어서인지 미틸과 루틸은 평소보다도 의욕이 가득했다.

한편, 피가로는 웅크려 앉은 채 지면에 손을 댔다.

일어났다고 생각했으나, 금방 묘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피가로

.......

 

현자

피가로?

 

파우스트

...어이, 이 토지는.

 

피가로

파우스트.

우선 진료소 안에서 이후의 조사 방침을 정하고 싶어.

거기다 모처럼 여기까지 오게 했잖아. 일부러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환영해주고 싶어.

 


 

피가로에게 이끌려, 일단 진료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건물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한정된 공간에, 오래된 책상과 의자, 침대와 약을 늘어놓은 서랍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어떤 곳도 햇볕이 잘 들고 깨끗했다. 약해진 심신에 좋은 공간일 것이다.

 

피가로

좁은 곳이지만 편하게 쉬어도 돼.

 

현자

피가로, 차까지 내주시다니 감사해요.

 

히스클리프

이거, 무척 향이 좋네요.

 

피가로

마음에 든다니 기뻐. 약초를 달인,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는 차야.

다들 여기까지 이동하느라 피곤하잖아?

 

네로

그거 고맙네.

 

히스클리프

잘 마실게요.

 

현자

...쓰....

 

시노

써!!

 

루틸

오랜만이네, 피가로 선생님의 쓴 차.

 

미틸

으으... 이 차, 맨날 마셔도 쓰네요.

 

다들 고전하고 있는 와중, 파우스트와 레녹스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네로

두 사람 다 잘도 태연하게 마시는구나. 쓰지 않아?

 

파우스트

쓴 맛의 차는 익숙하니까.

 

히스클리프

레녹스도?

 

레녹스

아니, 써.

 

현자

(쓰구나...)

 

미틸

맛은 조금 개성적일지도 모르지만, 이 쓴 차는 정말로 몸에 좋아요. 이걸 마시고 하룻밤 자면 엄청나게 건강해져요.

 

루틸

맞아맞아. 거기다 계속 마시면 이 맛이 중독된다고나 할까...

미틸과 자주 차를 마시러 여기 오곤 했어요.

 

미틸

네, 반갑네요!

 

피가로

어, 혹시 두 사람이 여기 자주 왔던 건 이 차가 목적이었던 거야?

피가로 선생님을 만나러 와줬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서럽네에.

 

루틸・미틸

아하하, 농담이에요.

 

미틸

전... 피가로 선생님도, 이 진료소도 엄청 좋아해요.

병이나 상처를 입으면 왠지 불안해지잖아요. 여긴 그걸 '괜찮아, 안심하렴'하며 받아주는 장소니까요.

그래서 커서는 선생님의 진료소에서 약사로 도우며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피가로

미틸...

 

미틸

실은 그런 공부도 겸해서 진료소에 왔던 것도 있어요.

앗. 물론 피가로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예요!

 

피가로

아하하. 고마워, 미틸의 마음 무척 기뻐.

그럼 네 책상을 여기에 두는 건 어떠니?

 

미틸

어...? 괘, 괜찮나요?

제가 여기서 일해도...

 

피가로

물론. 약장과 작업대도 옆으로 이동시키면 일하기 편해지려나.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며 온화하게 웃는 피가로에게, 미틸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웃음이 번졌다.

 

현자

(이 진료소는 남쪽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소중한 장소구나...)

 

남성

저기, 실례합니다...!

 

여성

피가로 선생님 계신가요!?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진료소의 문이 두드려졌다.

방문해온 것은 젊은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 남성의 팔에는 아기가 안겨 있다.

두 사람은 피가로의 얼굴을 보고 명백하게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남성

다행이다, 계셔서...! 여러분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싶어 찾아왔습니다...!

 

여성

선생님, 부디 이 아이를 진료해 주세요! 어젯밤부터 계속 우는 데다 우유를 먹여도 자꾸 토해내요.

 

피가로

정말이네, 괴로운 듯이 울고있어. 자, 안으로 들어와요.

 

부부는 이 근처 마을에 사는 듯했다. 마을에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이곳이 가장 가까운 진료소가 되는 듯했다.

 

남성

그야말로 하늘이 도우셨어. 피가로 선생님이 우연히 계시다니.

젊은 선생님이 있는 구름의 거리의 진료소를 찾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좀 멀어서...

 

현자

젊은 선생님? 구름의 거리에도 의사가 있는 건가요?

 

미틸

네. 젊은 선생님은 크라크 씨를 말씀하시는 거죠?

 

여성

맞아맞아. 그 분이야.

때때로 피가로 선생님 대신 이 진료소에 와서 진찰해주기도 하셨지.

그래서 젊은 선생님이 여기 오는 걸 기다릴지, 기다리지 않고 구름의 거리로 갈지 남편과 상의했는데...

일단 호수 근처까지 와보니 피가로 선생님의 모습이 보여서 급하게 달려왔어.

 

피가로

그거 잘 됐네. 병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그 애도 바쁜 몸이니까 그렇게 자주는 여기 오지 못할거야.

 

레녹스

구름의 거리 환자 분들께서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네요. 젊은데다 수완이 좋다는 평판이라 하더군요.

 

루틸

역시 피가로 선생님의 제자 분이시네요!

 

파우스트

...제자?

 

시노

제자라는 건, 그 녀석도 마법사인 건가?

 

피가로

아니, 인간이야. 의사가 되고싶어 하길래 내가 첫걸음을 떼게 해준 것 뿐이야.

자, 그보다...

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피가로

생각해보면 마법관에서 살기 시작한 뒤로 제법 시간이 흘렀네.

두 사람과 얘기하니까 나도 그리워졌어.

지금은 의뢰가 별로 없기도 하니까 다음에 남쪽의 마법사들끼리 남쪽 나라로 돌아갈까. 거기서 한동안 느긋하게 지내보자.

 

미틸

어, 그래도... 저희는 현자의 마법사로서의 역할이...

 

피가로

역할이 있기 때문에야말로, 란다.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만큼 휴식도 확실하게 취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만전의 상태로 움직일 수 없을테니까.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마음에 무리를 가게 하면 안 돼.

 

미틸

...네, 선생님. 알겠어요.

 

피가로

착하구나.

아직 몸이 나른할거야. 조금 쉬어 두렴.

 

미틸

네...

.......

 

레녹스

...잠든 것 같습니다.

 

피가로

약 기운이 돌 때가 됐으니까 말이야.

이번에 아픈 건 지친 것뿐만이 아니라 이 아이의 마음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아.

아마 가벼운 향수병이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친 거겠지.

 

레녹스

그래서 남쪽 나라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하셨군요.

 

피가로

뭐 그렇지. 지금의 미틸에게는 고향의 공기가 가장 도움이 될거야.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애착있는 토지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건 상의를 벗어버리는 것과 같은 거야.

왠지 추운 것 같고 가끔씩 마음이 기침을 하거든. 토지의 정령에 깊게 관련된 마법사라면 더욱 그렇지. 

 

레녹스

그렇군요...

아무튼 오늘 일은 루틸에게도 나중에 얘기해 두겠습니다.

 

피가로

...이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레녹스

누군가 눈치채고 루틸에게 미틸이 아픈 걸 알려준 게 아닐까요.

 

피가로

그럴지도.

안녕, 루틸. 어서와.

마침 잘 됐어.

 

루틸

아, 피가로 선생님.

 

현자

미틸의 상태는 어떤가요?

 

피가로

어라, 현자 님? 혹시 네가 루틸에게 알려준거야?

 

현자

네. 방금 루틸과 복도에서 만나서.

 

나와 루틸의 얼굴을 보고 피가로는 안심시키듯이 미소지었다.

 

피가로

이제 안정됐으니까 괜찮아. 금방 좋아질거야.

 

레녹스

방금 피가로 선생님의 약을 먹고 막 잠든 참입니다.

 

루틸

정말인가요? 다행이다...

 

우리는 휴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뺨은 긴장한 상태 그대로 좀처럼 웃어지지 않는다.

 

현자

피가로. 실은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피가로

.......

느긋하게 보내는 건 잠시 보류해둘까.

 

무언가 짐작한 듯이 피가로는 우리를 방으로 들였다.

 


 

레녹스

남쪽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현자

네. 두 사람이 도서실에서 떠난 뒤 조사의뢰가 도착했어요.

루틸에게는 이미 설명했지만...

 

의뢰서에 의하면 최근, 남쪽 나라의 어떤 지역에서 지진이 빈발한다고 한다.

절벽이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며, 땅에 묘한 구멍이 뚫리면서 피해는 점차 확대되어 부상자도 늘고 있다고 한다.

 

현자

피해 상황도 상당히 심각하지만, 심지어 그 지역이...

 

루틸

피가로 선생님의 진료소가 있는 장소와 아주 가까운 것 같아요.

 

피가로・레녹스

.......

 

피가로와 레녹스의 눈이 커졌다.

 

레녹스

진료소 근처에서 지진이...?

 

피가로

으음... 그 주변은 지진 같은 게 일어날 장소가 아닐텐데...

어쩌면 〈거대한 재앙〉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발생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루틸

아무튼 가서 조사해보죠.

 

레녹스

그렇네. 우선 현장의 상황을 확인해보고 싶어.

 

피가로

현자 님. 출발은 미틸의 회복을 기다리고나서 해도 괜찮겠어?

 

현자

물론이에요.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고, 미틸의 상태가 만전이 되면 조사하러 가도록 할까요.

그리고 이번엔 피해 규모가 큰 것 같으니까 서포트로서 다른 나라의 마법사에게 동행을 부탁할 생각이지만...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잘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파우스트

피가로, 있나.

 

피가로

파우스트?

별일이네, 네가 방문해주다니. 무슨 일 있어?

 

의외라는 시선을 받고 파우스트는 민망한듯이 모자를 내렸다.

 

파우스트

미안하군, 환자가 있을 때.

 

피가로

괜찮아. 지금은 약을 먹고 쉬고 있어.

 

파우스트

그런가.......

 

퉁명스러운 대답 속에 희미하게 안도의 기색이 있었다.

 

파우스트

아까 살짝 들렸는데, 남쪽의 마법사 앞으로 의뢰가 도착했다지.

혹시 일손이 필요하다면 동쪽의 마법사가 동행해도 좋아. 그걸 전하러 왔다.

 

담담하게 고한 파우스트는 한순간 침대 쪽을 훔쳐보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기피하는 그가 스스로 동행을 자청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픈 미틸을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현자

파우스트...

 

레녹스

파우스트 님...

 

루틸

파우스트 씨...

 

파우스트

뭐, 뭐야. 다가오지 마.

필요하다면, 이라는 얘기일 뿐이야.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 별로...

 

피가로

아니, 꼭 부탁할게.

고마워, 파우스트. 너희가 와준다니 엄청 든든해.

 

파우스트

.......

 

기쁜 듯한 피가로에게 파우스트는 미묘한 표정을 띄웠다.

 


 

며칠 후. 미틸의 회복을 확인하고 조사를 나간 남쪽과 동쪽의 마법사들은 남쪽의 탑에 도착했다.

 

레녹스

여기서부터는 빗자루로 이동합니다.

 

루틸

저희가 안내할테니 동쪽의 마법사 분들은 따라와주세요.

 

네로

그래, 알겠어. 따라갈 수 있을 스피드로 부탁한다고.

 

파우스트

그건 그렇고, 의뢰 때문인지 의사 집단처럼 보이는군.

 

현자

진료소에 출입할테니까 환자 분들이 낯설어하지 않도록 클로에가 준비해줬어요.

 

피가로

좋은 애란 말이야. 배려가 세심하달까.

 

미틸

오늘 의상도 엄청 멋져요. 나중에 클로에 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가야겠어요.

 

시노

미틸, 몸은 괜찮아?

 

히스클리프

혹시 상태가 안 좋아지면 걱정말고 말해줘.

 

미틸

감사합니다. 이제 완전히 좋아졌어요.

그때는 두 분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해요. 병문안도 와주시고...

죽 엄청 맛있었어요!

 

히스클리프

천만에요.

 

시노

흐흥. 그렇지.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약초 달인 약을 가지고 왔으니까.

 

히스클리프

아, 그거... 전에 시험에 나온 약이지.

 

시노

그래. 마시면 피로가 회복된다고 하던데.

파우스트가 말한 대로 이론 공부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군.

 

루틸

후후. 미틸에게 상냥한 형들이 무척 많이 생겼네요.

 

네로

저 녀석들, 미틸을 계속 걱정했으니까 말이야.

 

세 사람의 교류를 지켜보던 루틸과 네로는 보호자의 시선으로 미소지었다.

젊은 마법사들이 친근하게 미틸을 돌보는 모습은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피가로

슬슬 출발해볼까. 미틸은 막 나은 참이니까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선생님과 함께 날자.

 

미틸

네!

 

레녹스

현자 님은, 여기 제 빗자루로.

 

현자

감사해요, 잘 부탁드려요.

 


 

피가로의 진료소가 있는 러셀 호수는 구름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빗자루로 날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마을에 도착했다.

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그날 나는 도서실에서 현자의 서를 읽고 있었다. 조용하고 안정된 공간은 독서하기에 최적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도서실은 아까부터 묘한 긴장감에 휩싸여있다.

 

피가로

오, 파우스트잖아.

이렇게 가득 책을 쌓아놓고, 무슨 조사 중이야? 변함없이 열심히 공부하네.

 

파우스트

너랑은 관계 없잖아.

 

피가로

그러지 말고. 나도 수업에 쓸만한 자료를 찾으러 온 참이야.

 

현자

(...괘, 괜찮을까. 이 두사람이 함께 있으면 왠지 조마조마해...)

 

옛날에 파우스트가 혁명군으로 싸우던 무렵, 피가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피가로는 제자인 파우스트에게서 멀어졌고, 그 후 파우스트가 화형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버렸다.

현재 두 사람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피가로

헤에, 테스트를 만들고 있었구나? 이게 질문할 목록이야?

 

가시 돋친 태도에도 꿈쩍 않고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 안을 들여다보았다.

 

피가로

그렇구나. 너무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적당하고 알기 쉽네.

 

파우스트

어이, 이제 그만...

 

피가로

아, 잠깐. 이 문제, 다른 사례를 본 적이 있어.

옛날엔 이 방법이 가장 좋았지만, 최근에는 이렇게 하는 게 일반적인 것 같아. 나도 지금은 이걸 사용하고.

 

파우스트

...그런가? 하지만 이렇게 하면 신체에 부담이 갈텐데.

 

피가로

요즘 이 약초랑 나무열매는 숲의 깊숙한 곳에서밖에 찾을 수 없게 됐어. 북쪽의 따뜻한 곳이나 동쪽에는 남아 있지만.

이 약초를 입수하지 못했을 경우, 이걸 사용하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이거라면 부작용이 괴롭더라도 며칠 정도뿐이야.

 

파우스트

...여전하군. 치료도 그렇게 가차없이 하나?

 

피가로

뭐니뭐니해도 생명을 살리는 게 우선이니까 말이야. ...어라, 이 술식은 나도 시험해본 적 없어.

굉장히 간략화되어 있네. 잘 됐어?

 

파우스트

그래. 긴급 시에 이 방법이 더 편해.

이걸 대체할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피가로

이러면 힘이 모자랄거야. 북쪽의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는 더 강한 매개체가 필요해.

 

파우스트

그런 사태에 처하고 싶진 않지만... 역시 이건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고마워, 참고가 됐어.

 

옛날보다 조금은 침착해진 어조로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 차갑게 대하던 파우스트도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상담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현자

(...다행이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

 

평화가 지속될 분위기에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때.

 

히스클리프

죄송해요, 실례합니다!

 

시노

피가로 있냐!

 

시노, 히스클리프, 레녹스 이 셋이 도서실로 뛰어들어왔다.

레녹스의 팔에는 축 늘어진 미틸이 안겨있었다.

 

파우스트・피가로

!

 

현자

미틸!? 어떻게 된 거예요?

 

시노

우리와 함께 숲에서 마법 훈련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어.

 

히스클리프

저와 시노가 미틸을 업으려 했더니, 마침 지나가던 레녹스가 도와줘서...

 

레녹스

피가로 선생님께서 여기 계신다고 들어서 그대로 데려왔습니다.

 

미틸이 살짝 눈을 뜨려고 했다.

 

미틸

선생님...?

 

피가로

선생님은 여기 있어. 걱정 안해도 되니까, 눈을 감으렴.

 

피가로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미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피가로

...응. 레노, 내 방까지 옮겨줄래?

 

레녹스

알겠습니다.

 

시노

피가로, 미틸은 괜찮은건가?

 

히스클리프

설마 계속 상태가 안 좋았던 걸까. 빨리 눈치챘더라면...

 

피가로

괜찮아. 금방 좋아질테니까.

두 사람 모두 고마워.

 

파우스트

그에게 맡겨두면 걱정할 필요 없어. 나중에 죽이라도 만들어서 들고 가면 괜찮을거다.

 

어른들이 달래자 조금 진정된 것인지, 시노와 히스클리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노

알겠어.

 

히스클리프

병문안도 겸해서 나중에 들고 갈게요.

 

시노

좋아, 히스. 미틸이 건강해지도록 맛있는 죽을 준비하자고.

 

현자

시노, 죽을 잘 만드나요?

 

시노

네로가 잘해.

 

레녹스

네로가 만드는건가.

 

히스클리프

병문안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만들자. 요리하는 법은 내가 알려줄게.

 

시노

좋아. 엄청나게 강한 죽을 만들어주지.

기다리라고, 미틸.

 

현자

강한 죽...?

 

파우스트

어이, 이상한 건 넣지 말라고...?

 


 

레녹스

피가로 선생님, 미틸의 상태는...

 

피가로

열이 좀 높네. 일시적인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요즘 너무 훈련에 몰두했으니까 그 피로가 나타난 거겠지.

미틸, 입을 벌려보렴. 피가로 선생님의 특제 슈가와 약초를 달인 약이야.

 

미틸

.......

 

피가로

어때? 좀 괜찮아졌어?

 

미틸

네... 조금 편해졌어요.

저, 훈련하고 있었더니 다리가 비틀거려서... 아침엔 아무 일도 없었는데.

 

피가로

최근 미틸이 무척 열심히 했으니까. 몸이 좀 놀란 거야.

 

미틸

피가로 선생님, 레노 씨. 감사합니다.

모두에게도 폐 끼쳐서 죄송해요.

 

레녹스

신경쓰지 마. 우리도 다른 사람들도 걱정했어.

 

피가로

조금 안정되면 금방 괜찮아질거야. 빨리 모두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안심시켜주자.

 

미틸

...왠지 옛날 같아요.

 

피가로

옛날?

 

미틸

네. 제가 어렸을 때, 항상 이렇게 진찰해 주셨잖아요.

 

레녹스

어린이는 아프기 쉬우니까. 내가 마을에 있을 적엔 빗자루에 태우고 데려간 적도 있었지.

 

피가로

맞아 맞아, 루틸이 항상 걱정했었어. 대체로 하룻밤 지나면 회복되지만 좀처럼 열이 안 내려갈 때도 있었지.

감기가 심해졌을 때는 한동안 내가 돌봐줬었던가.

 

미틸

피가로 선생님의 진료소에서 지내던 때의 일, 저 지금도 자주 떠올라요.

진료소 창문에서 보이는 커다란 나무랑, 약 냄새가 섞인듯한 신기한 향...

아까 약이랑 슈가를 먹었을 때, 그때가 생각나서 왠지 그리웠어요...

 

피가로

선생님도 생각났어. 진찰하려 했더니 미틸이 내 손을 꼭 쥐던 게.

그 때 미틸의 손, 아주 작았었지.

 

미틸

에엑? 그래요?

그, 그건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피가로

지금보다 훨씬 더 아기였을 때니까 말이야. 상태가 좋지 않아서 불안했었어.

 

미틸

으으... 좀 부끄러워요.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특히 리케에게는...

 

피가로

아하하, 알겠어. 우리만의 비밀 말이지.

 

레녹스

그래, 비밀은 지킬게.

 

미틸

에헤헤, 감사합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캄페지오

 

히스클리프

그런 거야!?

 

브래들리를 쫓던 마도구를 네로가 드디어 되돌렸다.

 

네로

그런거지...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입 다물고 있었지만.

 

미틸

그래도 마그마 속에 처박히면 보통은 죽는 게...

 

시노

즉, 이 놈은 이미 죽은 브래들리란 건가.

 

레녹스

...그런거야?

 

브래들리

멋대로 죽이지 말라고! 보면 알겠지만.

그런거에 뻔히 당할 브래들리 님이 아니라고.

마그마 속에 처박힐 뻔한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공간의 문에 휩쓸렸다가 아슬아슬하게 재채기가 나와서, 어떻게 이 섬에 오게 된 거다.

 

피가로

그렇구나. 재앙의 상처 덕분에 살았네.

 

루틸

그런데 어째서 마법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거죠?

 

브래들리

나도 갈 생각이었지만 괴물이 공격해왔다고.

갚아줬더니 이런 장소로 도망쳐서 쫓아오는 데 조금 고생했지.

뭐어, 처부숴줬지만 말이다. 이 몸에게 싸움을 걸다니 운이 다했지.

 

무르

괴물은 어땠어? 커다란 거미이지 않았어?

 

브래들리

엉? 어떻게 알았냐.

 

전원

!

 

브래들리

뭐야, 단발머리 형씨도 노리고 있었던 건가. 어쨌든 이미 늦었어.

마나석이 돼서 이미 내 뱃 속에 들어갔다고.

 

시노・미틸・히스클리프

.......

 

과연 이 섬에 전해지는 거대 거미의 전설은 사실이었던 것일까... 지금으로선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현자

어쨌든 브래들리가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브래들리

그래. 겨우 돌아갈 수 있겠어.

네로, 마법관에 돌아가면 프라이드 치킨 만들어줘.

 

네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현자 씨에게도 확실하게 사과해둬.

엄청나게 걱정 끼쳤으니까.

 

시노

그건 그렇고, 방금 전의 네로는 박력 있었지.

 

히스클리프

응. 네로가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

북쪽의 마법사가 상대인데도 겁내지 않는달까...

 

네로

엉?

 

네로의 눈이 좌우로 이리저리 방황한다.

 

네로

어- 뭐어, 그...

지금은 이 녀석도 마법관에서 너희들과 함께 내가 만든 밥을 먹고 있으니까.

일단 대충 동료... 같은 거잖아. 그러니까, 저.......

겁낼 거 없다고나 할까...

그렇지?

 

브래들리

엄청 두루뭉술하게 말하잖냐...

그래도 뭐, 그런 거지.

 

어이없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브래들리는 왜인지 조금 기뻐 보였다.

뒤엉킨 실이 풀리는 것은 아직 한참 뒤의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히스클리프

시노.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혼자서 뛰쳐나가진 마. 또 이번 같은 일이 생기면 화낼거야.

 

시노

...미안. 앞으로는 되도록 제대로 말할게.

 

히스클리프

'되도록'은 안 돼. 일을 벌리고 나서 보고하는 것도.

 

시노

그래. 주의할게.

 

히스클리프

...웬일로 고분고분하네.

 

시노는 네로가 있는 쪽을 보았다.

 

시노

저런 식으로 히스에게 혼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지.

 


 

꿈을 먹는 고리의 소재와 모두에게 가져다줄 선물, 그리고 설마했던 브래들리.

무인도에서 다양한 놀람의 연속을 마주했던 우리들은, 두근두근 설레는 바캉스에 작별을 고하고 마법관으로 돌아갔다.

 


 

히스클리프

파우스트 선생님, 이거 저희가 만든 거예요.

 

시노

꿈을 먹는 고리라고 하는 부적이다. 악몽을 우적우적 먹어치운다고 하니까 파우스트의 악몽도 잔뜩 먹어주겠지.

 

히스클리프

사실, 저희는 이걸 만들기 위해서 남쪽 나라의 섬에 다녀온 거예요.

 

파우스트

그렇군. 몰랐어. 전혀. 추호도.

 

시노

놀랐나?

 

파우스트

그래. 놀랐어. 정말로 놀랐다.

 

시노・히스클리프

해냈다!

 

무르

파우스트, 엄청 국어책 읽기야!

 

피가로

진지하고 서투른 점, 옛날이랑 변함없네.

 

레녹스

혹시 파우스트 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을까요?

 

피가로

뭐,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들에겐 보이는 법이니까.

저 애들을 위해서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미틸

그래도 잘됐어요. 파우스트 씨, 무척이나 기뻐 보여요.

 

루틸

저건 분명 척하는 게 아닐 거예요.

 

파우스트

시노, 히스. 나를 위해 일부러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미안하군.

 

시노

흐흥. 파우스트, 고마워서 울어도 된다고.

 

파우스트

아니, 울지는 않는다만...

 

시노

뭐야.

 

파우스트

그래도 소중하게 간직하지. 고마워, 두 사람 다.

 

히스클리프

네!

 

시노

그래.

 


 

브래들리가 모습을 감추기 전, 네로와 나는 셋이서 술을 마시자고 계획했었다.

지연되어버린 그 계획을 이번에야말로 실행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현자

...어라?

 

식당에 네로의 모습은 있었지만 정작 브래들리는 없었다.

 

현자

어떻게 된 걸까요...?

 

네로

아~ 아마...

 

현자

!?

방금 그 소리는...?

 

네로

미스라 놈에게 빚 갚으러 간 게 아닐까.

 

천장이 날아갈 것 같은 흉포한 소리가 두 번, 세 번 들려온다.

 

현자

브, 브래들리, 오늘 올 수 있을까요...?

 

네로

그 녀석이 먼저 얘기하기도 했고, 기어서라도 오겠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는 네로의 얼굴은 기분 탓인지 개운해 보였다.

 

현자

네로, 오늘은 왠지 얼굴이 좋아 보여요.

 

네로

나도 꿈을 먹는 고리를 시노와 히스에게 받았거든. 그 효과일지도 모르겠네.

자... 식기 전에 프라이드 치킨을 먹어버릴까.

 

브래들리

어이! 날 냅두고 시작하지 말라고!

 

파티의 주역은 치열한 전투였음을 나타내듯 상처투성이로 나타났다. 무인도에서 만났을 때보다 약간 너덜너덜하다.

 

현자

브래들리, 괜찮아요?

 

브래들리

엉. 큰 거 두 방을 먹어버렸지만 나도 한 방 얼굴에 찍어줬어.

오늘은 이걸로 봐주도록 해주지.

자, 그럼 마셔볼까!

 

네로

끈질긴 놈이구만, 당신도.

 

브래들리

하, 이 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우는 꼬맹이도 그치게 만드는 브래들리 님이라고.

 

씨익 뻔뻔스럽게 웃는 브래들리에게 네로는 한 마디, 웃으면서 받아쳤다.

 

네로

알아.

 

마치, 아주 친한 친구끼리의 신호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의 캄페지오

 

네로

이거 전부 거미줄인가...?

 

모든 장소에 거미줄 같은 것이 둘러쳐져 있다.

단순한 거미줄이라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크다.

어젯밤 무르에게서 들은 거대 거미의 얘기가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미틸・히스클리프

.......

 

현자

(그런데 전부 너덜너덜하네...)

 

천장은 간신히 남아 있지만 벽과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계단은 부서진 데다 깨진 석상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졌다기 보다 무언가가 날뛴 듯한 생생함이 있었다.

 

피가로

이 부서진 흔적을 보니 최근에 일어난 일이네.

 

신전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저 우리의 발소리만이 섬뜩하게 울리고 있었다.

 

네로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해. ...현자 씨, 우리에게서 떨어지지 마.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 같이 탁 트인 장소로 나왔다. 굵은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출입문이 무수하게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신전의 중심부인 듯하다.

 

히스클리프

시노! 있으면 대답해!

 

하지만 부름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다.

 

미틸

없는걸까...

 

낙담하려던 그 순간, 신전을 떠받치고 있던 커다란 기둥 하나가 눈앞에서 기우뚱하고 흔들렸다.

 

현자・미틸

...!

 

루틸・히스클리프

현자 님!

 

레녹스

미틸!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블프 스노스》 !

 

루틸

《올토닉 세토마오제》 !

 

루틸이 주변에 마법으로 벽을 두르고, 히스클리프는 내가 맞지 않도록 기둥의 움직임을 재빠르게 바꿨다.

레녹스는 순간적으로 팔을 뻗어 미틸을 끌어당겼다.

기둥은 그대로 땅을 울리며 쓰러졌다. 모래먼지가 자욱하게 떠올라 시야가 차단된다.

 

루틸

콜록... 현자 님, 괜찮으세요?

 

현자

콜록 콜록... 고마워요.

 

무르

.......

 

우리가 기침하는 가운데, 무르는 가만히 고양이처럼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무르

기척이 있어.

 

미틸

네?

 

무르

역시, 근처에 뭔가가 있어.

 

무언가라니...? 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모래먼지 저편에서 갑자기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히스클리프

...! 현자 님, 뒤로!

 

시노

...히스?

 

히스클리프

...!?

 

루틸・미틸・네로・레녹스

어?

 

그림자의 정체는 시노였다. 머리에 거미줄이 붙은 채로 우리 일행을 조금 의외라는 듯이 바라본다.

 

현자

시노...!

 

피가로

역시 여기로 왔었구나.

 

시노

그래. 어젯밤 너희를 지켜주겠다고 말했으니까.

괴물이 있든 어떻든 사전조사하러 왔어.

괴물이든 짐승이든, 먼저 쓰러뜨려 두면 너희는 안전하게 신전에 들어올 수 있잖아?

 

네로

그럼 말이라도 하도 가라고. 네가 갑자기 없어지니까 다들 걱정해서...

 

시노

상황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신전 안쪽에 거미줄이 잔뜩 있는 걸 발견해서. 내친김에 모으고 있었더니 시간을 꽤 잡아먹었어.

 

그리고 시노는 쓰러진 기둥을 내려다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시노

큰 소리가 나서 서둘러 보러 왔지만, 설마 갑자기 기둥이 쓰러질 줄은.

히스, 다친 데는 없어?

 

히스클리프

.......바.

바보야! 내가 할 말이야!

아무 일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시노

그렇게 화내지 마. 자 이걸 보라고.

소재를 산더미만큼 모아왔어. 이거면 꿈을 먹는 고리를 만들 수 있겠지.

 

시노는 포대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어깨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히스클리프

하아...

 

네로

정말이지, 너는...

 

미틸

그래도 다행이에요. 시노 씨가 무사해서.

 

루틸

응, 그러게. 좀 무서운 신전이기도 하고,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고...

 

무르

거대 거미에게 잡아먹혀 버렸을지도!

 

시노

이 신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왕이면 거대 거미의 머리도 선물로 가져가려고 생각했는데.

 

레녹스

그렇단 건, 거대 거미는 역시 단순히 전설상의 얘기일 뿐이었다는 건가.

 

현자

...그래도, 그럼 아까 무르가 느꼈던 기척은...?

 

갑자기 네로의 예리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로

...윽! 엎드려!

《아도노디스 옴니스》 !

 

현자

!?

 

우물쭈물하며 지면에 엎드린 내 머리 위로 네로의 마법도구가 거칠게 날았다.

완화되었던 공기가 순식간에 긴박해졌다.

 

현자

(여, 역시 괴물이...!?)

 

하지만 신음소리도, 격렬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백지와 같은 침묵이 흐른다.

조심조심 고개를 들자...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의 광경이었다.

 

브래들리・네로

.......

 

브래들리의 총구가 네로의 머리에, 네로의 커틀러리가 브래들리의 목에.

각각 정면으로 들이대고 있다.

 

네로

...엥?

 

서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망설이면서 동시에 마법도구를 내렸다.

 

루틸

브래들리 씨, 어째서 여기에...?

 

브래들리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결국 너희도 여기로 흘러들어와 무인도 생활을 하게 된 건가.

 

시노・레녹스

너희들'도'?

 

무르

혹시 브래드, 쭉 여기에 있었어?

 

브래들리

쭉? 그렇게 말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진 않았잖아.

것보다 뭣 좀 먹을 걸 줘봐. 여기 오고나서 제대로 된 음식을 안 먹어서 배가 고프다고.

 

네로

...너, 까불지 말라고!!

 

브래들리

우왓?

 

네로

망할 덜렁이가 바보같은 짓을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디서 뒈지진 않았는지, 마음 놓고 밤에 잠도 못 잤는데! 살아있으면 빨랑빨랑 돌아오라고, 이 멍청아!

 

브래들리

어, 어이...! 그만하라고, 위험하잖아!

 

한 번 되돌렸던 커틀러리가 브래들리를 쫓아다닌다.

네로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도 기에 눌려 멍하니 입을 열었다.

 

미틸

저기, 저희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시노

어떻게 된 거지? 브래들리는 혼자서 임무를 하러 갔던 게 아니었나?

 

무르

그건 비밀을 감추기 위해 지어낸거야!

사실은 말이야, 브래들리는 미스라의 실수로 마수와 함께 마그마 속으로 처박혔대!

 

루틸・미틸

엑!?

잠들지 못하는 밤의 캄페지오

 

 

네로

쉿.

 

한쪽 눈을 감은 네로는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암묵적인 이해라는 것일까. 애들의 계획은 이미 어른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이서 후우 바람을 불며 느긋하게 허브티를 홀짝였다. 몸이 조금씩 따뜻해진다.

 

현자

마음이 진정되는 향이네요... 왠지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졌어요.

 

네로

역시 선생의 보증대로구만.

 

현자

이 차와 꿈을 먹는 고리가 있으면 더욱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네로

하하, 분명 악몽을 먹어주는 부적이었던가.

그런 괴식가라면 내 것도 입에 맞을지도 모르겠네.

 

현자

네로도 악몽을 꾸는건가요?

 

네로

...그래. 뭐어, 요 근래의 일이지만 말이야.

 

툭, 네로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현자

(최근인가...)

 

차의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떠올린다.

 

현자

(나도 그닥 잠을 못 잤네... 브래들리는 지금쯤 괜찮을지 계속 생각나버려서...)

(...아...)

 

거기서 겨우 깨달았다.

브래들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네로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괜찮다고, 밝게 웃으면서.

하지만 모닥불을 바라보는 지금의 네로는 긴 밤과 어울리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현자

(...사실은 네로도 계속 걱정했구나...)

...동료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얘길 들었으니 무리도 아니죠.

 

네로

...동료?

 

큰 생각없이 고른 말이었지만 네로는 조금 놀란 모습으로 되물었다.

 

현자

어, 그게... 두 사람은 북쪽의 마법사와 동쪽의 마법사니까 별로 관련 없었다고 해도...

브래들리는 맛있는 밥을 좋아하고, 네로는 맛있는 밥을 만드는 걸 잘하잖아요.

지금은 현자의 마법사로서 함께 마법관에서 살고, 함께 네로의 밥을 먹기도 하니까.

그래서 동료나 친구라고 불러도 이상할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좀 이상했나요?

 

네로

...아니,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걸로 하자.

 

네로는 복잡한듯이 웃었다. 그 시선에는 씁쓸함과 그리움 같은 것이 있었다.

네로와 브래들리도 또한 많은 것이 얽히고 설켜서, 단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로 보인다.

복잡하게 뒤얽혀버린 실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분명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현자

(과거의 일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쌓아올릴 새로운 관계도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 될지도 모르지만.

 

현자

빨리 브래들리가 돌아오면 좋겠네요.

 

네로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목에 뭔가가 걸린듯이 침묵했다. 앞머리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천천히 일어선 네로는 침묵을 감추려는 듯이 웃었다.

 

네로

...미안. 졸리기 시작했어.

당신도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네. 불은 꺼둘게.

내일 또 봐, 현자 씨.

 


 

다음 날 아침,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이 뜨였다. 텐트 밖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무슨 일 있었나요?

 

히스클리프

현자 님! 시노가 없어졌어요...!

 

현자

엑!?

 

네로

일단 모든 텐트를 찾아봤는데 자기 자리를 착각한 건 아닌 것 같아.

 

레녹스

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왔습니다만, 시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루틸

식재료는 아직 남아 있고 아침밥을 조달하러 갔다고 생각되진 않아서...

 

현자

그럴수가. 대체 어디로...

 

미틸

시노 씨, 설마 혼자서 신전에 간 건...

 

전원

!

 

어젯밤 시노의 모습을 떠올리고 가슴이 철렁인다.

 

현자

설마, 거대 거미를 퇴치하러...?

 

네로

그 녀석이라면 그럴 법하네. 일단 보러 가볼까.

무르, 길 안내를 부탁할게. 피가로, 만일을 위해 동행해줘.

 

무르

좋아!

 

피가로

으음, 젊은이의 행동력을 얕보고 있었어.

 

히스클리프

네로, 나도!

 

네로

아니, 히스는 여기서 기다려줘. 우선 우리들이 상태를 보고 올테니까.

그냥 산책 나간 것뿐이고 아무 일 없을지도 몰라.

 

히스클리프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잖아!

 

얌전한 그에게는 드물게 감정적인 목소리였다.

 

히스클리프

못 견디겠어. 시노가 나를 위해서 몇 번씩이고 다쳐서 피투성이가 되는 게.

난 미숙하고 마법사로서도 미덥지 않아.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시노를 구하고 싶어. 쭉 함께하고 싶은 소중한 친구를, 내 손으로 지키고 싶어.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는, 마지막에 한숨처럼 작게 사그라들었다.

 

히스클리프

내가 바라는 건, 그것 뿐이야...

 

현자

히스...

 

그런 히스클리프의 머리를 네로가 헝클어지도록 쓰다듬는다.

 

네로

...정말이지, 무대뽀에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친구를 두면 큰일이란 말이야.

 

마치 누군가를 겹쳐보는 듯한 말에 히스클리프는 눈을 깜빡였다.

 

히스클리프

으, 응...

 

네로

좋아, 그럼 같이 갈까! 가서 시노에게 잔뜩 화를 내주자고.

 

미틸

저어, 저도 가고 싶어요...!

어제 히스클리프 씨와 함께 열심히 하자고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히스클리프

미틸...

 

루틸

그럼 다같이 가는 건 어떨까요? 애초에 모두 함께 신전으로 갈 예정이기도 했구요.

 

레녹스

그게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어. 현자 님, 괜찮으십니까?

 

현자

물론이죠. 다같이 가보죠!

 

무르

히스클리프대, 출발!

 

루틸・네로・레녹스

히스클리프대...?

 

히스클리프

시, 신경쓰지 마...!

 


 

무르를 따라 숲 깊숙히 헤치고 들어갔다. 나아갈수록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지고 바닥도 좋지 않았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조차 끊겼을 때쯤, 갑자기 신전이 나타났다.

 

미틸

우왓...

 

거대한 석조건물이다.

언제쯤 세워진 것일까, 이끼가 낀 모습은 고대의 유적과도 비슷하게 장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현자

이 숲에 이런 게...

 

히스클리프

...시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피가로

그래도 묘한 기척은 느껴져.

 

레녹스

안으로 들어가보자.

 


 

신전 내부는 밖보다 더 황량했다. 초목이 내부를 뒤덮고 있었으며 벽을 덮듯이 담쟁이덩굴이 휘감겨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잠들지 못하는 밤의 캄페지오

 

무르

머나먼 옛날, 이 섬 사람들은 어떤 거대한 거미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어.

하지만 그 거대한 거미는 탐욕스러워서, 아무리 공물을 바쳐도 만족하지 않았어.

마지막에는 이 섬의 주민들 모두를 먹어버렸대!

 

미틸・히스클리프

...읏.

 

꿀꺽 크게 숨을 삼킨다. 상상도 못한 처참한 일화에 미틸도 히스클리프도 안색이 새파래졌다.

 

시노

그런 거미,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어차피 그냥 낡아빠진 전설일 뿐이잖아.

 

무르

어떠려나! 그래도, 거대한 거미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장소는 발견했다구.

숲 안쪽에 오래된 신전이 있었어. 무언가가 숨어있는 것 같은 기척도 느꼈어.

 

히스클리프

그 기척이라면, 설마...

 

무르

거미일지도 모르고, 이 일대에 사는 짐승이 근거지로 삼고있을 뿐일지도 몰라. 어느 쪽일까?

 

현자

.......

 

밤의 어둠까지 더해져, 아까 발을 들였던 숲이 무서운 괴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잡아먹은 거대한 거미가 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시노

걱정 마, 현자.

 

시노는 식사하던 손을 멈췄다.

불안과 두려움 한 점 없는 붉은 눈동자가 곧게 나를 바라본다.

 

시노

내가 지켜주지.

 

시노는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시노

미틸도, 루틸도 레녹스도.

물론, 히스도 말이지.

 

모두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면서 힘차게 끄덕인다.

 

히스클리프

시노...

 

피가로

믿음직하네, 시노.

모처럼 모험할 기회야. 모두들 어엿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있으니까. 세계 제일의 명의와 천재학자야.

안심해도 좋아.

 

무르

안심! 안심!

 

시노

맡겨둬. 거미든 괴물이든 대낫의 먹이로 삼아주지.

그 멧돼지처럼 저녁 식사 메뉴로 만들어도 좋겠군.

 

미틸

그, 그건 좀...

 

루틸

거미는 먹을 수 있을까...? 무슨 맛이 날까.

 

어느새인가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와 있다. 네로가 웃으면서 다시 한 번 스테이크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네로

뭐어,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서쪽의 마법사들 특유의 살짝 과장한 그런 거겠지.

여행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고향의 무서운 이야기 같은 걸 들려준 건 아닐까?

 

현자

아아, 수학여행의 숙소에서 흔히들 하는 괴담 같은...

 

네로

뭐야 그거.

 

현자

아뇨, 제가 있던 세계에서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구나 싶어서.

 

웃음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하자, 모닥불 너머에서 남쪽의 마법사들이 사이 좋게 과일을 먹고 있다.

 

루틸

현자 님, 같이 드시지 않겠어요?

 

말을 걸어준 루틸의 손에는 반으로 쪼개진, 맛있어 보이는 나무열매가 있었다.

 

미틸

레노 씨가 나이프를 쓰지 않고 손으로 쪼개준 거예요!

 

현자

엑, 이 나무열매를 손으로? 어떻게 말인가요?

 

 

레녹스

이렇게 입니다.

 

레녹스는 나무열매 하나를 손에 쥐고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열매를 쪼갰다.

 

현자

우와! 정말로 딱 반으로...!

 

루틸

어때요, 놀랍죠?

 

미틸

분명 놀랄거라 생각해서 현자 님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현자

놀랐어요. 이렇게나 깨끗하게 쪼개지다니...!

대단하네요, 레녹스. 역시 힘이 세서 그런가요?

 

레녹스

아뇨, 약간의 요령이 있습니다. 익숙해지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루틸

와아, 궁금해요. 어떻게 하는 건가요?

 

피가로

레노, 그대로 내 것도 부탁할게.

 

미틸

정말, 레노 씨에게 너무 맡기신다구요. 선생님도 같이 배워요!

 

남쪽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분위기는 머나먼 외딴 섬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행복한 가족에 섞여들듯이 휴우하고 마음이 편해진다.

 

현자

(정말로 위험한 장소라면 피가로가 눈치채줄테고...)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피가로가 이쪽을 보며 미소 지었다.

 

피가로

아무튼 내일은 그 신전에 가보도록 할까.

꿈을 먹는 고리의 소재를 입수하는 게 원래의 목적이었으니 말이야.

 

현자

그렇네요. 가보도록 해요.

 

미틸

저기, 히스클리프 씨. 시노 씨에게서 들었는데요...

두 분이 꿈을 먹는 고리를 만들러 온 건 파우스트 씨에게 드리기 위한 거죠?

 

히스클리프

응. 선생님, 때때로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꿈을 먹는 고리를 선물하자고 생각했거든.

 

미틸

...저, 예전에 파우스트 씨께 무척 신세를 졌어요.

그래서 저도 파우스트 씨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히스클리프

그랬구나.

그럼 미틸도 함께 선생님을 위해서 거미줄을 모으러 가자. 섬의 전설은 조금 무섭지만, 나도 열심히 할게.

 

미틸

네...! 열심해 해봐요!

 

무르

내일은 모두 함께 탐험이다-!

 


 

밤도 깊어졌고, 내일에 대비해서 쉬기 위해 마법사들은 각각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도 누워서 눈을 감았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현자

(...잠이 안 와...)

 

몇 번인가 뒤척인 뒤, 단념하고 텐트에서 빠져나왔다.

파도 소리에 이끌리듯이 해변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선객이 있었다.

 

네로

...뭐야, 현자 씨인가.

 

네로는 내가 온 것을 깨닫고 난처한 듯이 웃었다.

무슨 일 있어? 라고는 묻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잠이 달아나버린 것이겠지.

 

현자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너무 조용한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네로

그럴지도 모르겠네. 조금쯤은 소음이 있는 게 딱 좋기도 하니까.

 

네로는 모닥불에서 끓인 따뜻한 물로 차를 타 주었다.

 

네로

여기. 잠이 잘 오게 되는 허브티야.

 

현자

감사합니다.

 

컵을 받아들자 부드럽고 마음이 편해지는 향기가 뺨에 닿는다.

 

현자

...향이 좋네요.

 

네로

파우스트에게서 받은거야. 시노와 히스가 무리하지 않도록 잘 돌봐달라면서.

 

현자

엑. 파우스트가...?

 

꿈을 먹는 고리를 만들러 온 것을 비밀로 하고 싶다고 했던 시노와 히스클리프의 의향도 있어서 그에게는 숨기고 있었다.

 

현자

설마 파우스트는 이미 알고...

잠들지 못하는 밤의 캄페지오

 

 

히스클리프

와, 달아...!

 

현자

그쵸. 엄청 달아요!

뒷맛도 상큼해서 후식으로 딱일 것 같아요.

 

히스클리프

주스로 만들어도 맛있다고 도감에 쓰여있는 걸 본 적이 있어서 선물로 주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현자

좋네요! 다들 기뻐할거라 생각해요.

히스는 박식하네요.

 

히스클리프

우연히 책에서 읽은 부분일 뿐인걸요. 무르라면 더 다양한 식물을 잘 알겠지만, 전 그 정도의 지식은 없어서...

 

현자

그렇지 않아요. 저 혼자서는 이 과일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히스가 함께여서 다행이에요.

 

히스클리프

감사합니다. 현자 님께 도움이 된다면 기뻐요.

 

히스클리프는 조금 부끄러워한 뒤 시선을 내리고 침묵했다. 그 후 쑥스러운 듯 입을 연다.

 

히스클리프

...방금은 죄송했습니다. 저희 때문에 신경 쓰시게 만들어서...

 

현자

아뇨, 그런...

 

아까 둘의 싸움을 떠올리고 나도 말을 망설였다. 그의 단정한 옆모습에 그림자가 진다.

 

히스클리프

시노는 항상 저렇게, 사소한 일이라도 궂은 일이나 위험한 일로부터 저를 떨어뜨리려고 해요.

제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행동인 걸 알고 있지만, 솔직히 그런 취급 받는 게 가장 상처 받아요. 마치 선을 긋는 것 같아서...

 

현자

히스...

시노는 히스를 지키고 싶어하죠. 히스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히스클리프

저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시노가 소중하지만 말이에요.

 

히스클리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노도 히스클리프도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없는데도, 소중하게 대하는 방법이 맞지 않는다.

둘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나는 새삼스레 통감했다.

 

히스클리프

안 되겠죠. 이렇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멈춰버리면.

스스로의 약점을 직면하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야겠죠.

저도 네로나 파우스트 선생님처럼, 더욱 강해지고 싶어요.

 


 

그 후에 우리는 과일을 양손 가득 안고 갈 정도로 잔뜩 모았다.

히스클리프가 마법으로 따준 덕분에 과일은 어느 것 하나 상처 없이, 파는 것처럼 반질반질하게 맛있어 보였다.

 

현자

가득 땄네요!

 

히스클리프

내일치도 충분할 정도로 모았으니까요. 시노에게 보여주고 놀라게 해줄거예요.

 

현자

아하하. 시노, 분명히 놀랄거예요.

 

그때,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들을 밀어헤치며 불쑥 나타난 것은 거대한 멧돼지였다.

 

현자

꺄악--!?

 

히스클리프

와앗-!

 

현자

.......

어라?

 

시노

뭐야, 너희인가.

 

잘 보니 거대한 멧돼지...가 아니라, 그것을 등에 짊어진 시노였다.

그 뒤에서 멧돼지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던 네로도 나타난다.

 

시노

거물을 잡았다고. 오늘은 이놈을 스테이크로 만들어주겠대.

그렇지, 네로?

 

네로

그래.

 

히스클리프・현자

.......

 

현자

반대로 놀라게 되었네요...

 

히스클리프

네...

 

현자

(좀 아쉽다...)

 


 

그날 밤, 모두가 모아온 식재료를 네로가 손질하고 조리해주었다.

메뉴는 호쾌하게 멧돼지 스테이크와 생선 통구이.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베어문다. 차례로 모두에게 웃음이 번진다.

 

미틸

맛있어-!

 

현자

엄청나게 맛있네요!

 

루틸

이렇게나 두꺼운 고기인데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시노

고마워하라고. 내가 사냥한 멧돼지다.

사냥감이 없었으면 레녹스의 양이 저녁밥이 됐을지도 모르니까.

 

레녹스

그래. 고마워, 시노.

 

현자

(슬쩍 양을 숨겼어...)

 

피가로

식감을 살린 와일드한 맛이 좋네.

 

네로

신선한 식재료는 심플하게 먹는 게 가장 맛있으니까 말이지.

 

히스클리프

루틸 일행이 잡아온 생선도 무척 맛있어.

 

루틸

다행이다! 물이 깨끗해서인지 물고기가 엄청 많았어.

그래도 한 마리, 무척 거대한 물고기를 놓쳐버려서.

 

레녹스

아아, 그건가. 미틸의 키 정도 됐었지.

 

미틸

에엑...!?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서로 웃으면서 먹는 저녁은 각별했다.

지붕도 없는, 불빛조차 모닥불에 의지하는 불편함도, 오늘밤은 특별한 향신료다. 맛있는 요리가 더욱 맛있고 즐거워진다.

 

히스클리프

과일도 많이 따왔으니까 식후에 다같이 나눠먹자.

 

피가로

아주 좋네, 디저트까지 있다니.

 

미틸・무르

아싸-!

 

미틸

...어?

 

현자

무르!? 어느새...!

 

레녹스

어서와. 저녁 식사에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무르

다녀왔어-!

있지, 소재가 있을만한 장소, 찾았어.

 

루틸

와아, 정말인가요?

 

미틸

당장 내일 채집하러 가죠!

 

시노

그러고보니 무르, 슬슬 가르쳐줘. 꿈을 먹는 고리를 만드는 소재라니, 결국 어떤 식물이지?

 

무르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르

식물?

 

히스클리프

어라? 아니야?

틀림없이 식물의 섬유를 가공해서 사용하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르

땡-. 틀렸어!

 

네로

식물이 아니라면 뭘로 만드는데?

 

무르

거미줄이야.

꿈을 먹는 고리는 이 섬에서밖에 살지 않는 특별한 거미줄을 가공해서 만드는 거야.

 

벌레를 싫어하는 히스클리프는 그 말에 무서워했다.

 

히스클리프

거, 거미...

아니, 파우스트 선생님을 위해서 힘내야지...!

 

그의 갈등을 제쳐두고, 무르는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무르

옛날에는 이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다들 없어졌어!

왜라고 생각해?

 

현자

네? 왜라니...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