掌に刻まれている
테노히라니 키자마레테이루
손바닥에 새겨져있는
 
ツギハギのようなその線に触れて
츠기하기노 요-나 소노센니 후레테
누덕누덕한 그 선에 닿아서
 
ひび割れそうな頭と
히비와레소-나 아타마토
깨질 듯한 머리와
 
硝子が刺さった心で前へ 走る
가라스가 사삿타 코코로데 마에에 하시루
유리가 박힌 마음으로 앞을 향해 달려가
 
壊れかけの世界 崩れそうで目眩
코와레카케노 세카이 쿠즈레소-데 메마이
부서져가는 세계 무너질 것 같아서 어지러워
 
空っぽな体で 歪な視界
카랏포나 카라다데 이비츠나 시카이
텅 빈 몸과 일그러진 시야
 
ゾクリと脈を打つ 命の線
조쿠리토 먀쿠오우츠 이노치노센
오싹하게 맥박이 뛰는 생명의 선
 
ナイフでなぞって 伸ばしてしまえたら
나이후데 나좃테 노바시테 시마에타라
나이프로 따라긋고 이어버리면
 
ねぇ 誰か教えて 月が見えるなら
네- 다레카 오시에테 츠키가 미에루나라
누군가 알려줘 달이 보인다면
 
消さないで まだ消さないで
케사나이데 마다 케사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아직 지우지 말아줘
 
消えないで まだ消えないで
키에나이데 마다 키에나이데
사라지지 말아줘 아직 사라지지 말아줘
 
 
消さないで 消えないで
케사나이데 키에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사라지지 말아줘
 
消さないで 消えないで
케사나이데 키에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사라지지 말아줘
 
文学的で 退廃的で
분가쿠테키데 타이하이테키데
문학적이고 퇴폐적이고
 
現実的で 空想的で
겐지츠테키데 쿠-소-테키데
현실적이고 공상적이고
 
感情的で 感傷的で
칸죠-테키데 칸쇼-테키데
감정적이고 감상적이고
 
快楽的で 壊滅的で
카이라쿠테키데 카이메츠테키데
쾌락적이고 괴멸적이고
 
絶対的で 普遍的で
젯타이테키데 후헨테키데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不自然な「今」の見方を
후시젠나 이마노 미카타오
부자연스러운 「지금」의 관점을
 
壊れかけの世界 崩れそうで目眩
코와레카케노 세카이 쿠즈레소-데 메마이
부서져가는 세계 무너질 것 같아서 어지러워
 
空っぽな体で 歪な視界
카랏포나 카라다데 이비츠나 시카이
텅 빈 몸과 일그러진 시야
 
時には月を 月には愛を
토키니와 츠키오 츠키니와 아이오
시간에는 달을 달에는 사랑을
 
愛には罪を 罪には罰を
아이니와 츠미오 츠미니와 바츠오
사랑에는 죄를 죄에는 벌을
 
罰には人を 人には夢を
바츠니와 히토오 히토니와 유메오
벌에는 사람을 사람에는 꿈을
 
夢には貴方を 貴方には誓いを
유메니와 아나타오 아나타니와 치카이오
꿈에는 당신을 당신에게는 맹세를
 
ゾクリと脈を打つ 命の線
조쿠리토 먀쿠오우츠 이노치노센
오싹하게 맥박이 뛰는 생명의 선
 
ナイフでなぞって 伸ばしてしまえたら
나이후데 나좃테 노바시테 시마에타라
나이프로 따라그어 이어버린다면
 
ねぇ 誰か教えて 月が見えるなら
네- 다레카 오시에테 츠키가 미에루나라
누군가 알려줘 달이 보인다면
 
消さないで まだ消さないで
케사나이데 마다 케사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아직 지우지 말아줘
 
消えないで まだ消えないで
키에나이데 마다 키에나이데
사라지지 말아줘 아직 사라지지 말아줘

제1화 지금은 오래된 고성소의 바닥————Praeteritus limbus vorago

 

예선 고성소

낙하하는 별의 꿈에, 누구나가 영원을 오인(誤認)했다.
거듭해 겹쳐지는 패자의 목소리. 죄업을 늘리는 승자의 무위.
기적은 없더라도, 「고성소의 바닥」에서 너를 기다리겠다.


아방게르 / SE.RA.PH 최상층 안젤리카 케이지

 
달의 성배전쟁 최종국면.
일곱 계층을 이겨 온 승자 키시나미 하쿠노와 네로, 그들을 가로막는 트와이스, 세이비어와의 전투. (본 장면은 과거회상이므로 대사는 없고, 본편과는 확연히 다른 시간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X X X
카메라, SE.RA.PH의 중층(제5계층) 근처에서
위로 올라가 최상층, 치천의 우리(안젤리카 케이지)로.
그곳에는 게임판 최종보스인 각자(세이비어)와 홀로 싸우는 네로의 모습이.
세이비어는 태양과도 같이 네로의 위쪽에 군림한 채, 그 머리 위에는 후에 차크라 바르틴(대륜)이 되는 콜로니가 형성되고 있다. 네로는 공중에 있는 의사 영자를 발판 삼아 탕탕 뛰듯이 공중전을 하고있다.
(네로의 발이 닿는 곳에 파문이 일어나고, 그 순간에만 발판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네로, 공중 높이 앉아있는 세이비어에게 육박하여 화염을 두른 검•원초의 불을 격렬하게 부딪쳐대도 세이비어에게는 닿지 않는다.네로는 이미 만신창이.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드레스도 너덜너덜한 상태.
 
하지만 그 눈동자는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승산 없는 전투를 전심전령으로 싸운다.
그 모습은 비장하다기 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분노로 가득 차 있다.
X X X
그런 네로의 수백 미터 아래.
안젤리카 케이지로 이어지는 제7계층의 폐허신전에 주저앉아 하늘을 오려다보는 키시나미 하쿠노(게임판 여주인공)의 모습이 있다.
하쿠노는 이미 몸 반쪽이 사라진 상태. 절대 살 수가 없다.
트와이스는 치천의 우리에서 네로와 함께 싸우던 하쿠노의 숨통을 먼저 끊었다. 하쿠노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아래층인 7계층으로 떨어뜨리고, 거기다 두 다리를 파괴했다. 아무리 투지가 있더라도 절대로 기어오를 수 없도록.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하쿠노는 눈부신 듯이, 슬픈 듯이,
그저 홀로 싸우는 네로를 올려다보고 있다.
X X X
네로와 세이비어의 전투가 최고조를 맞이한다.
네로의 일격도 세이비어의 인에 의해 막힌다.
세이비어의 보구, 천륜성왕(차크라 바르틴)은 하늘을 뒤덮고,
고리의 중심에 있는 땅 위의 네로를 향해 빛의 창을 일제히 날린다.
검으로는 버티지 못하고 발이 묶인 채로 못 박히듯 휩쓸리는 네로.
거기에 소천륜에 비치된 일곱 개의 무구 중 하나가 결정타를 날리듯이 쏘아진다.
(차크라 바르틴의 보구명은 천륜성왕이지만, 그 원조인 각자는 전륜성왕이라는 다른 가능성도 갖고 있으며, 이 전륜성왕은 일곱 개의 무구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와 연관된 일곱 개의 "자비의 일격"이다)
이것은 광탄이 아닌 질량의 무기.
지표면을 가르는 미사일, 인도식 벙커버스터 같은 것이다.
네로는 이것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막아냈지만, 치천의 우리의 지면이 꿰뚫리며 SE.RA.PH를 낙하한다.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유성처럼 추락하는 네로.
그것을 지켜보고 숨이 끊어지는 하쿠노.
네로는 38만 킬로미터의 영자거리로 떨어져, 최하층...... 예선회장의 밑, SE.RA.PH의 바닥에 격돌했다.
대지의 구조체(스트럭처)와 표면(텍스처)을 날려버리고 드러난 흙덩이에 쓰러진 네로.
그 주변 지형은 네로를 묻은 크레이터가 된 채, 묘혈 같은 장소가 된다.
천공에서 애도의 종이 울려퍼진다.
그것은 차크라 바르틴의 대륜이 기동한 축가이기도 했다.
(이 순간, 지금까지 거행되었던 모든 성배전쟁은 정지. SE.RA.PH는 문 셀의 손을 떠나게 된다)
X X X
이상이 "990년 전의 싸움"의 끝.
이 싸움을 겪고 SE.RA.PH 내부는 여유가 없는, 죽음과 멸망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된다. 지금부터 잿빛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명확한 암시라고도 할 수 있다.
 


A파트

 
학원, 방과후의 교실
새빨간 교실에서의 회화. 붉은색과 검은색만으로 만들어진 세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삼인조.
교실에서 서로의 (마스터로 온)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리, 신지, 하쿠노.
얼굴이 분명하게 비치는 것은 하쿠노 뿐으로, 아마리와 신지의 얼굴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리 「저...... 그닥 제대로 된 이유는 없어요」
아마리의 입가는 상냥하고 온화하게 미소 짓는 형태이다.
아마리 「영자해커로서의 재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우수한 정도일 뿐이라」
신지 「그렇구만」
끄덕이는 신지. 하쿠노도 끄덕인다. (이 하쿠노의 기억은 실제로 신지 일행과 예선을 지나온 "신지의 친구"의 것)
신지 「나는 게임 챔피언이야. 그래서 여기에 온 거지. 세계 최고의 메인 프레임이 가동하는 게임은 세계 최고의 게임일 게 당연하잖아?」
아마리 「멋져요.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거군요」
아마리는 신지에게 철두철미 상냥하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연기하고 있을 뿐)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겨우 하쿠노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 사람 「그래서, 너(당신)는 무슨 이유 때문에?」
하쿠노 「———」
하쿠노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한순간, 그 얼굴에 데드 페이스가 떠오르고——
그 순간, 카메라가 끊긴다.
 


학원교실 / 수업 풍경

 
하쿠노의 시점.
하쿠노, 멍하니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딘가, 하늘 높은 곳에서 비행기가 날고있다.
제트음이 이명처럼 들린다.
평화로운 문명, 과도기를 연상시키는 광경.


CHECK▶ 게임판에서는 「사람들이 발사된 인공위성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의 빛나는 미래를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성은 날고있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고 있는 것. 그 사실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영원을 오인했다」고 말하는 장면.


나이 든 교사 「키시나미. 키시나미, 하쿠노——」
하쿠노 「———어?」
교사에게 호명되어 퍼뜩 정신을 차리는 하쿠노.
지금은 수업중이며, 하쿠노는 앉은 채로 멍하니 있던 듯하다.
하쿠노 「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특징 없는 대답이었지만 나약하진 않다.
분노의 심지는 주위에 숨기면서도 당당한 침착함을 가진 하쿠노의 목소리.
나이 든 교사 「지루한 수업인 건 알지만 중요하니까 잘 들어 두세요」
노교사의 지쳤지만 학생을 신경쓰는 목소리.
교실 안의 학생들이 킥킥 웃는다. 그 중에서도 친근하게 돌아보며 웃어대는 신지.
신지 「재난이었구만」
아마리 「그래도 수업중에 졸면 안 돼요」
친한 친구답게 웃는 신지와 곤란한 듯이 웃는 아마리.
하쿠노 「.........」
작게 끄덕이는 하쿠노.
수업이 재개되었다.
나이 든 교사 「즉, 서번트라는 건 인류사를 무기로써 이용한 획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사에 새겨진 영웅의 소환. 신화의 재현이라고도 할 압도적인 힘의 실체화」
「이 기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포토닉 순결정체——— 태양계 최고의 아티팩트인 양자 컴퓨터 『문 셀』입니다」
노교사가 서번트인가 뭔가를 설명한다.
생소한 수업 내용에 하쿠노는 눈을 꿈뻑거리며 교실을 관찰한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서기 2000년 무렵 일본의 고등학교의 교실 풍경.
그러나 교정에는 평범한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탑이 있고, 그곳에는 두 개의 이상한 전광표시가 있다.
하나는 붉은 문자로 카운트하는 시계.
시각을 표시하기 위함이 아닌, 시시각각 카운트다운 되고 있다.
하나는 거대한 출석표. 256명이나 되는 명찰이 탁탁 움직인다.
나이 든 교사 「실체화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물리적인 소환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곳은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름아닌, 달의 영자허구세계 SE.RA.PH」
「지상에서 접속•투영된 256의 혼이 담긴 전뇌체의 동산」
「물론 NPC도 존재합니다만」
「요컨대 이 칠천의 바다야말로 영령 소환에 최적화된 유일한 필드인 것입니다」


CHECK▶ 노교사가 말하는 내용은 여기서는 시청자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OK.


하쿠노도 흥미없는 듯 출석표를 바라보고 있다.
신지와 아마리를 비롯해 레오와 린, 라니와 트와이스, 댄이라는 각각의 이름.
(참고로 키시나미 하쿠노의 이름은 없다. 그의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되는 것은 1화의 마지막 뿐이다)
나이 든 교사 「자, 이걸로 모든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학원생활을 후회하지 않게 보내길」


CHECK▶ 교사 나름의 이별의 말. 몇 번이나 반복 시뮬레이트된 『2030년부터 3029년까지 거듭해온 패자들에 의한, 질리지도 않는 패자의 예선』이지만, 그가 이 대사를 말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 그런데 NPC에 불과한 노교사이지만, 이번에도 또다시 "기록된 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학생들을 조금 감회 깊게 연민하여 말한 것.


나이 든 교사 「아아, 그리고 소각로에는 가까이 가지 마세요. 들어간 학생의 절반은 의미소실에서부터 자살로 빠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신지 「뭐라는거야, 선생. 고성소엔 어떤 부탁을 들어도 안 갈 거야」
나이 든 교사 「그렇죠. 그럼 여러분, 저는 이만」
노교사, 평온하게 웃으며 떠나간다.
 


수업 후 / 교실

 
노교사가 떠나고 학생들은 담소를 나누며 교실을 떠나간다.
책상에 앉은 채 타이밍을 놓친 하쿠노의 곁으로 신지와 아마리가 다가온다.
신지 「뭐냐, 또 혼자서 방과후를 보낼 셈이야?」
하쿠노 「글쎄」
평범한 반응을 하는 하쿠노. '신지가 나에게 권유하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신지 「완전 재미없는 놈이구만. 나참, 어쩔 수 없네. 내버려두면 넌 항상 혼자잖아. 여기선 관대한 내가...」
아마리
「오늘도 셋이서 느긋하게 점심. 맞죠?」
신지
「......뭐어, 응. 그런거지. 수업은 오전이면 끝나니까.」
쑥스러움에 말하지 못하던 속마음을 아마리에게 들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신지.
신지가 (선의의 행동일지라도) 자연스레 뾰족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을 아마리가 부드럽게 돕는다. 그런 관계인 두 사람이다.
하쿠노
「고마워」
하쿠노, 안도하는 표정.
이 둘이 자신의 친구라고, 이제서야 실감/공감이 되었기에.
아마리 「그래서, 어디로 가나요?」
신지
「아무데나. 식당이야 엄청 많잖아」
하쿠노, 두 사람이 재촉해서 밖으로.
교실은 베란다에서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다(복도는 필요 없습니다).
밖에 나오자, 그곳은 평범한 학원풍경이 아니다.
다른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 광대하고 다중구조의 학원도시가 거미줄처럼 통로(다리 모양의 것)으로 이어져있다.

DAY-1 / 귀로의 아침Ⅰ

 

조금 전까지 지상에 깔려있던 노선은 예고도 없이 지하노선으로 바뀌었다.

전철은 인공의 빛을 흩뿌리면서 어둠 속을 헤엄치듯 나아간다.

 

삐걱거리는 차량 소리. 같은 간격으로 지나가는 인공등.

시트 너머로 전해져오는 진동을 초침 삼아 거리와 시간의 경과를 생각해본다.

 

아침, 오전 6시 33분.

이 전철에 탄 지 30분 정도 지났다.

이제는 돌아갈 일 없는, 오랫동안 신세를 진 사람들의 집을 나온 지 그 정도뿐인 시간과 거리가 지났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인간으로서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 정도뿐』이라며 멀지않은 거리라고 느끼는 것인가,

『이제 이걸로 끝』이라며 정리하게 되는 거리인 것인가.

 

자신은 어느 쪽일까 생각해본다.

고심한 끝에 그 어느 쪽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8인용 좌석에는 나 혼자만이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승객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인, 옆 열의 좌석에서 졸고있는 정장차림의 남성과 문 앞에 서있는 소녀 뿐이었다.

이른 아침의 전철이라는 것도 있어서 차량 내부는 꽤 조용했다.

 

생각에 잠긴 탓인지, 차량 밖의 구동음은 신기하게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막연히 어두운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선이 떠올랐다.

난잡한 외계의 소리는 닿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것은 쓸모없는 내 공상과, 혈액을 토해내는 심장소리와, 불과 한 시간 전에 지나갔던 추억 뿐.

 

그것은 우연한 이야기였다.

"토오노 마키히사가 죽었다. 그 집에 맡겨두었던 토오노 시키는 본가로 돌아오도록."

7년 가까이 소식이 없던 본가에서의 연락은, 그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토오노 본가의 결정에는 거스르지 않는다. 나는 아직 학생이며 양육비를 받고있는 신분이기도 하다.

저택으로 돌아갈 날을 전날 밤이 아니라 당일 아침으로 정한 것은 고집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았던 집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싶다―――

본가의 결정이라고는 해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나를 가족으로 맞아준 아리마 가(家)사람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의였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도 맛있었어요."

해가 뜨기 전에 아침밥을 다 먹고 식탁을 뒤로한 채 내 방 앞에서 손을 모았다.

 

오랜 세월에 대한 감사치고는 무미건조했지만, 마음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미련이 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밝은 일들 뿐이었다. 가져가는 짐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리마 가를 나올 때 배웅해준 것은 케이코 씨 혼자였다.

최대한 조용히 다른 가족을 깨우지 말아달라 부탁했던 것은 나였다.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버님과 미야코에게도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7년 간――내 친모 역을 맡았던 사람은, 무척이나 슬픈 눈이었다. 이 사람의 그런 얼굴을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토오노 저택에서의 생활은 힘들겠지만 힘 내. 넌 몸이 약하니까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

걱정이 담긴 말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 7년 동안은 정말이지 평온했다. 아리마 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내가 있던 시간이 고통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 정도로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7년이나 지나면 대부분 다시 건강해져요. 이래보여도 은근히 튼튼하다고요, 제 몸은."

"맞아, 그랬지. 토오노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 뿐이지만, 특히 너는 겁이 없었지. 어릴 때부터 줄곧 우리가 놀랄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아이였어."

 

쓴웃음 섞인 말에 나도 똑같이 웃음이 지어졌다.

케이코 씨 안에서는 아직 내가 "우리 애"인 것이 기뻤다.

 

"그건 과대평가예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도 건강하세요."

"그래. 너도 건강하렴, 시키."

다녀오렴, 이라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 케이코 씨 다웠다.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것이 불과 40분 전의 일.

내가 새로운 생활을 맞이할 시점이며,

토오노 시키라는 인간의 지금까지의 인생이었다.

 

밖의 경치가 조금씩 바뀌어간다.

강 건너편 교외인 야시로기를 지나 도시인 소우야로 들어온 것일 터.

 

선로는 다시 지상을 향해간다. 완만하게 경사를 올라가는 감각.

인공 불빛에 익숙해진 눈을 일깨우듯이 햇살이 비쳐들었다.

 

도시를 바라보며 전철은 달린다.

마을은 아직 대부분이 눈을 뜨지 않았다.

밖은 냉기를 품은 대기가 가득했다.

여름의 모습이 사라진 10월의 가을 아침 그 자체였다.

 

생각해보니 이 풍경을 1년하고도 반 년을 바라봐왔다.

전철에서의 등교풍경도 이걸로 끝이다.

지나쳐가는 풍경에 겹쳐보듯이, 이 7년 간을 되돌아본다.

 

10살 무렵――보통이라면 즉사였을 중상에서 회복하고,

선생을 만나고,

아리마 가에서 살게 되고,

이렇게, 고등학교 2번째의 가을을 맞이했다.

 

그때――헤어질 때 선생님이 말했던 특별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기도 했고, 선생님이 주신 안경을 쓰고 있는 한 『선』을 볼 일은 없었다.

토오노 시키는 평범하지만, 좀처럼 얻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부터는 그것이 좀 더 소중해지게 되었다.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분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이다.

본가...... 토오노 가의 가풍은 일반가정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귀찮...... 너무 무거운 감이 있다.

 

「......애초에 학교보다 넓은 서양식 저택이라니 상상도 안 가는데...」

어린 시절엔 '잘도 견뎠구나' 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생활로 돌아갈까보냐' 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고민은 안 되어도 주눅이 들게 되는 것이다.

 

전철은 큰 역에 도착해 몇 분 간 정차했다.

완행이어서 옆 급행열차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홈에 사람 그림자는 없었다.

이 시간이면 정장차림의 샐러리맨이 몇 명인가 있을 법했지만 오늘 아침은 특히나 조용했다.

 

옆 선로를 급행열차가 지나간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음 정거장은――

익숙한 안내음. 공석으로 닫히는 자동문.

학교가 있는 소우야 역까지 앞으로 네 정거장인 것을 확인하고,

 

「으아아, 잠깐 잠깐!」

 

「하아~ 위험했다 위험했어,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어」

 

자동문 틈새로 미끄러지듯 나타난 것은 우리 고등학교 여학생이었다.

초록색 리본이므로 3학년이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손에 든 가방은 부 활동 도구일까.

 

――――

문득 시선이 겹쳤다.

상급생인 여학생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터벅터벅 가까이 오나 싶더니,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아,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흘깃흘깃 쳐다봐서

상대방의 미소에 따라 무심코 사과하게 되었다.

 

「아뇨 아뇨, 눈에 띄는 행동을 한 제가 잘못한 거예요. 선배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그나저나 아침에 약하다던 얘기, 정말이었네요

 

쿡쿡 웃는 상급생.

그 행동에 멍해있자,

 

「저기. 저예요, 저라구요. 저번주에 봤으면서 벌써 잊어버린 건가요?

 

「어라...... 시엘 선배...?

일순간 기억이 흔들렸다.

분명 본 기억이 있다. 이 사람과는 학교에서 몇 번인가 만났다.

애초에 우리학교 학생인 시엘 선배를 모르는 녀석은 없을 것이다.

 

누가 불렀는가, 소우야 고등학교의 만능 선배를.

1학년에 고민하는 학생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상담해주며,

2학년에 방황하는 학생이 있으면 문제 그 자체를 해결하며,

3학년에 곤란한 학생이 있으면 후배 괴롭히기를 멈춰준다.

 

교사들과 학생회보다도 믿음직하기 때문에 진정한 학생회장이라 부르는 학생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분명 나도 저번주에 사소한 일에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멍하니 있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선배의 말대로 아침에 약한 것과 7년만에 본가로 돌아가는 걸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나는,


1. 아쉽지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2. 살짝 의문이 생겼다.

3. 모처럼이니 차분하게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말문이 막힌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선배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였다.

 

「어... 선배는 전철로 통학하시나요?

「그렇네요. 때에 따라 이용해요. 토오노 군은? 집이 먼가요?

「멀어요, 기점에서 오거든요. 그래도 이제 그것도 끝이네요. 전철로 통학하는 건 오늘로 끝이라

「오호. 집이 이사를 한다거나?

「........

 

그럴듯한 설명이 잘 떠오르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것으로 "사정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주었는지, 시엘 선배는 더 묻지 않았다.

 

15분의 시간 동안 적당한 대화를 계속했다.

전철은 금방 목적지인 소우야 역에 도착했다.

DAY-0 / 유리로 된 달 - 프롤로그

 

다음 날.

만난 지 7일째의 들판에서 선생님은 커다란 트렁크를 한 손에 들고왔다.

 

「자. 이걸 쓰고 있으면 이제 이상한 낙서는 보이지 않을거야」

 

선생님이 내민 것은, 평범해 보이는 안경이었다.

 

「저, 눈은 안 나빠요」

「상관없으니까 써. 도수는 없으니까」

 

선생님은 강제로 안경을 나에게 씌웠다.

그러자―――

 

「우와! 굉장해, 굉장해요, 선생님! 낙서가 하나도 안 보여요!」

「당연하지. 일부러 언니네 사무소의 마안살을 빼앗아가며 만든 아오자키 아오코 혼신의 작품이니까. 함부로 다루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시키」

 

「응, 소중하게 다룰게요! 그런데 역시 선생님은 대단해! 그렇게나 싫었던 선이 모두 사라지다니, 왠지 마법 같아요, 이거!」

「그야 당연하지. 왜냐면 나, 마법사인걸」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선생님은 트렁크를 지면에 놓았다.

 

「하지만 시키. 그 선은 사라진 게 아냐. 단지 보이지 않게 한 것 뿐. 그 안경을 벗으면, 선은 다시 보일거야」

「보이지 않을 뿐?」

 

「응. 그것만은 치료할 수 없는 부분이야. 너는 그 눈과 어떻게든 타협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싫어. 이런 무서운 눈, 필요없어요. 또 선을 잘라버리면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잖아요」

 

「아아, 이제 두 번 다시 선을 자르지 않겠다고 했던 그거 말이지. 바보구나, 그런 약속 따윈 가볍게 깨뜨려도 돼」

「......그래요? 하지만 절대 하면 안 될 짓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해선 안 되는 짓이야. 하지만 그 눈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너만의 힘인걸. 그러니까 그걸 사용하는 건 너의 자유. 그 눈이 존재하는 것에 관해선, 너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너를 비난할 수 없어.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네가 그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 뿐이야, 시키」

 

「내가―――무엇을 하는가―――」

 

선생님은 내 눈을 들여다보듯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야. ......응, 역시 좋은 눈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귀찮은 일을 마주했네 싶었어. 왜냐면 너, 많은 걸 잃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문제 따윈 없었어. 너는 확실하게 살아있어. 그렇다면 인생을 걸고 만회하렴」

 

「―――――」

―――이 때의 가슴 속 빛을, 눈가까지 벅차오른 기쁨을, 나는 평생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너는 여기 있어도 돼"라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나를 긍정해주었다.

 

「시키. 너는 개인이 보유하는 능력 중에서도 엄청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말았어.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존재한다는 건,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거야. 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힘을 나눠주지 않아. 네 미래에는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오기 때문에 그 직사의 마안이 있다고 할 수 있어. 그건 잔인한 일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마. 너는 무척이나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금의 네가 있는 한, 그 눈은 결코 틀린 결과를 낳지 않을거야」

 

「성인(聖人)이 되어라, 라고는 하지 않을게. 너는 네가 올바르다고 믿는 어른이 되면 돼. 하면 안 되는 일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너라면, 10년 후에는 분명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거야」

 

선생님은 일어나더니 트렁크에 손을 뻗었다.

「아, 그래도 웬만하면 안경을 벗으면 안 돼. 특별한 힘은 특별한 힘을 부르는 법이니까. 자, 내가 건네는 충고, 그 두번째. 반칙을 쓸 타이밍과 승부를 걸 타이밍을 잘 생각하라.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만, 도저히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 안경을 벗고 잘 생각한 뒤에 힘을 행사하렴」

 

「그 힘 자체는 결코 나쁜 게 아니야. 결과를 좋게 만들지 나쁘게 만들지는 어디까지나 네 판단에 달렸으니까」

 

트렁크를 들어올린다.

――선생님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작별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무리예요, 선생님. 저 혼자서는 좋은 일로 만들 수 없어요. 실은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있어서, 저는 저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안 돼요. 선생님이 없으면 이런 안경이 있어도 안 될 게 뻔하잖아요......!」

 

「시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 것. 자기자신도 속일 수 없는 거짓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

 

선생님은 언짢은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이젠 괜찮다는 걸. 그렇다면 그런 시시한 말을 하면서 어렵게 되찾은 자신을 버려서는 안 돼」

 

「그럼 이제 작별이야. 바이, 시키. 어떤 인간이든 인생이란 함정 투성이야. 넌 그걸 헤쳐나갈 힘이 있으니까, 굳게 마음 먹으렴」

 

선생님은 가버린다.

너무나 슬펐지만 나는 선생님의 친구니까, 굳게 마음 먹고 배웅하기로 했다.

 

「――응. 안녕, 선생님」

 

「좋아, 잘했어 잘했어. 그 마음으로 항상 건강해야 해. 마지막 교훈. 위기일 때는 우선 침착한 뒤에 잘 생각해볼 것. 괜찮아. 너라면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테니까」

선생님은 기쁜 듯이 웃었다.

 

사아, 바람이 불었다. 풀숲이 일제히 흔들린다.

선생님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바이바이, 선생님」

그리 말하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겠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남은 것은 수많은 말과 이 신기한 안경 뿐.

단 7일 간의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배웠다.

 

멍하니 서 있었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얼마나 바보인가.

나는 작별인사만 했을 뿐.

고맙다는 한 마디를, 그 사람에게 전하지 못했다.

 

내 퇴원은 그로부터 금방 후였다.

퇴원한 후, 나는 토오노 가(家)에서가 아닌 다른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몸은 회복했지만 후유증이 남게 된 나는 토오노 가에 있어 불필요한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토오노 시키는 혼자서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새로운 생활을, 새로운 가족과 보낸다.

10살의 여름을 보낸 병실을 뒤로 한다.

 

커튼은 변함없이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다.

너무나 푸르른 하늘에 딱 한 번 눈을 가늘게 뜬다.

건조한 바람이, 여름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DAY-0 / 유리로 된 달 - 프롤로그

 

깨닫고보니 병원 침대에 있었다.

 

커튼이 펄럭펄럭 흔들리고 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쌀쌀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제멋대로인 색깔에 무심코 눈을 가늘게 뜨고 만다.

 

이곳이 어디인가, 지금이 언제인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머리가 쫓아가지 못한다.

 

일어나려고 손에 힘을 주자 손보다 먼저 몸이 움찔거렸다.

숨을 멈추고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뻐끔 거린다.

 

이런 것을 '눈에서 불꽃이 튄다'라고 말하는 거겠지.

딱딱한 침대에 손을 올린 순간, 찢기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

 

「―――、―――」

깊게 숨을 들이쉬고, 누운 채로 자신의 몸을 관찰한다.

 

양손은 둘둘 붕대가. 왼발도 하얀 깁스가 둘러져있다.

이마 주변이 매우 갑갑했기에, 분명 머리에도 붕대가 감겨있을 것이다.

가슴에는 보기 싫은 것을 감추듯, 커다랗고 두꺼운 반창고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왼팔에는 튜브가 하나 꽂혀있다.

그것이 정맥주사인 것을, 나는 왠지 모르게 깨달았다.

 

이렇게 잠에서 깨기 전에 비몽사몽하게 주변을 보았던 덕분이겠지.

 

이곳보다 어둡고 약품 냄새가 나던 방도, 가슴의 반창고에서 늘어뜨린 몇 개인가의 튜브도,

병문안 왔던 무서운 양복차림의 어른도, 그 어른에게 혼나면서도 와주었던 동생의 모습도,

아이처럼 떠드는 박사님의 모습도,

전부, 마치 꿈을 꿨던 것처럼 기억한다.

 

「어? 너, 눈을 떴구나......!?」

익숙하지 않은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는 대답할 체력도 없었다.

 

여자애는 허둥대면서도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방 밖으로 달려갔다.

탁탁탁탁.

서두르는 건 알겠지만, 병원에선 뛰면 안 돼.

 

「―――――」

몸은 일으킬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창문을 올려다본다.

찌릿하고 안구가 쪼개지는 것 같다.

머릿속을 날붙이로 휘젓는 느낌.

 

정말――거짓말처럼 푸른 하늘.

새하얀 햇살보다도, 얼룩 한 점 없는 푸른색이 너무 잔혹해서 눈이 아팠다.

 

그로부터 며칠후.

눈을 뜨고나서 한동안 나는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올려다본 창밖은 변함없이 드높은 하늘. 펄럭펄럭 흔들리는 커튼.

뺨에 닿는 건조한 바람. 얼룩 하나 없는 푸른색은 눈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어째서 병원에 있는 것인지는, 조금씩이지만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약속을,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어버린 느낌이 들어 창밖을 계속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토오노 시키 군. 회복 축하해.」

처음 보는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구해왔다.

 

웃는 얼굴은 무척 상냥했고 말투도 온화한, 잘 만든 어른의 인상.

분명 스위치 하나로 미소와 정색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깔끔해 보이는 새하얀 옷도, 이 아저씨에게는 딱 맞았다.

 

「시키 군? 선생님이 하는 말, 알아듣겠니?」

「......아뇨. 전 왜 병원에 있는 건가요」

「기억 못하는구나. 넌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에 휩쓸렸단다. 가슴에 유리파편이 박혀서 말이지, 어떻게해도 살릴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어」

 

하얀 아저씨는 방긋방긋 웃는 모습으로 왠지, 의사 선생님답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어떻게해도 살릴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그 표현에, 참고있던 구역질이 올라왔다.

 

「......졸려요. 자도 되나요」

「그래, 그러렴.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 해」

 

의사 선생님은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정말 못 봐주겠다.

 

「선생님,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니, 시키 군」

 

「왜 몸 전체에 낙서를 칠한 건가요. 이 방도 군데군데 금 투성이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은 아주 잠깐 동안 웃는 얼굴을 무너뜨렸지만, 금방 방긋방긋한 얼굴로 돌아와 의자에서 일어섰다.

터벅터벅 바닥을 울리며 커튼 너머로 사라지고,

 

「.......역시 뇌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뇌외과의 아시야 선생에게 연락해. 그리고 시신경 손상이 의심되는군. 오후는 안과로 가서 검사를 하도록」

의사 선생님은 다른 사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몰래 간호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상해. 다들 몸에 낙서를 칠했어」

 

엉망진창으로 칠해진 선이 병원 전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보고있는 것만으로 엄청 기분이 안 좋다.

 

「...뭘까, 이거」

침대에도 낙서가 있다.

손가락을 갖다대었더니 손끝이 움푹 들어갔다.

 

――아

좀 더 가느다란 물건이면 깊이 들어갈 것 같았다.

선반에 있던 플라스틱 나이프로 낙서를 따라 그었다.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나이프는 끝까지 낙서 속으로 들어갔다.

 

재미있었기에 그대로 낙서를 따라 침대에 나이프를 미끄러뜨렸다.

우당탕.

무거운 소리를 내며 침대는 깔끔하게 갈라져버렸다.

 

「꺄아아아아!

 

뒤에서 울린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문 앞에는 굳은 얼굴로 간호사 선생님이 서 있었다.

 

「어떻게 침대를 부순거니, 시키 군

의사 선생님은 침대를 부순 이유가 아닌, 그 방법을 집요하게 물었다.

 

「저 선을 따라 그었더니 잘렸어요. 대체 왜 이 병원은 금 투성이인 거예요?

 

「적당히 하지 않겠니, 시키 군. 그런 선 같은 건 없어. 그래서 어떻게 침대를 부순거니. 혼내지 않을 테니까 알려줄래?

 

――그러니까, 선을 따라 그었을 뿐이라니까요

......알겠어. 이 얘기는 내일 또 하자

 

한숨을 쉬는 의사 선생님.

낙서 얘기를 하고나서부터 그 상냥한 웃음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분명 스위치가 고장난 것이겠지.

이 병원은 부서지기 쉬운 것들 뿐이니까.

 

결국, 누구 하나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 낙서를 나이프로 자르면, 그것이 무엇이든 깨끗하게 잘린다.

힘 따위 필요없다. 종이를 가위로 자를 때처럼 간단히 자를 수 있었다.

 

침대도. 의자도. 책상도. 벽도. 바닥도.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분명, 사람도.

 

낙서는 모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에게만 보이는 선.

 

저것은 분명, 누더기 같은 것이다.

상처를 꿰멘 자국.

내 가슴처럼 수술을 해도 아직 낫지 않은, 만지기 해도 너덜너덜 흩어지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렇지라도 않으면 어린애의 힘으로 벽을 자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

또 간호사 선생님이 외쳤다.

올록볼록하게 잘린 벽을 보고 나를 노려본다.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울려퍼진다.

내 귀는 이상해져서 별로 시끄럽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그치지 않는 소리는 불이 붙은 매미 같아서 불안해졌다.

 

모든 것이 너덜너덜했다.

눈을 뜨고있는 것만으로, 살아있는 것만으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아아,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세상은 이렇게나 누더기 투성이에,

무척이나 부서지기 쉬운 곳이었다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것이겠지.

이 이상한 세계를 눈치채지도 못한다. 이 상처투성이인 일상을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보인다.

두렵고 무서워서 걸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면 그 후로 귀는 얼어붙은 채로, 소리는 나는데도 무척이나 조용했다.

가슴의 상처만이 사이렌처럼 울렸다.

그런데 『그 후』는 『언제』인 걸까.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박박 머리를 긁어봐도 꺼내어지지 않았다. 분명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서 버려버린 게 틀림없다. 잠궈도 잠궈도 물이 흘러나오는 수도꼭지 같이.

 

......아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전부 설명이 된다. 거울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야 있었다면 제일 먼저 ■였을 것이다.

분명 웃으면서 머리를 쪼갰을 것이다. 즉, 부서질 것 같은 건 주변이 아니라, 고장난 건 나였을 뿐인 이야기라는 것 같다.

 

그래서이겠지.

그 후로 2주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 후로 2주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 후로 2주나 지났는데도, 나는 홀로 누더기 투성이인 세상에 살고있다―――

 

병실에는 있고싶지 않다. 낙서 투성이인 곳에 있고싶지 않다.

이곳에서 도망쳐서 아무도 없는, 먼 곳에 가기로 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이상한 거라고,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뛰쳐나갔다.

 

하지만 가슴의 상처가 아파서 조금밖에 달리지 못했다.

깨닫고보니. 그곳은 병원 옆에 있던 들판으로, 조금도 먼 장소엔 가지 못했다.

 

「......커헉」

가슴이 아파서, 무척 슬퍼서, 지면에 웅크려 캑캑거렸다.

 

어디에도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된다.

누더기가 보이는 인간은 분명 어디에도 있어선 안 된다.

 

콜록, 콜록. 아무도 없다.

여름의 끝자락, 풀숲 투성이의 바닷속.

이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직전에.

「너. 이런 곳에서 웅크려있으면 위험해」

분명하게 귀에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어.........?」

「어, 가 아니지. 안 그래도 작으니까 풀숲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안 보이잖아. 조심해, 하마터면 걷어차일 뻔했으니까」

 

여자는 언짢은 듯이 나를 가리켰다

.......왠지 조금 화가 났다.

나는 반에서도 앞에서 네번째니까, 그렇게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걷어차인다니, 누구한테?」

「바보구나, 당연하잖아. 여기 있는 건 나랑 너 뿐이니까, 나 말고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야?」

여자는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했다.

 

「뭐, 여기서 만난 게 인연 같기도 하니, 조금 말상대가 되어줄래? 나는 아오자키 아오코라고 하는데, 너는?」

 

친구 같은 가벼움으로 여자는 손을 내밀어왔다.

거절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토오노 시키라 이름을 대고 휩쓸리듯 손바닥을 마주잡았다.

 

여자와의 수다는 무척 재밌었다.

이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어린애니까』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제대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 말을 들어주었다.

 

여러 일들을 얘기했다.

우리집에 대한 것. 역사가 있는 오래된 가문으로, 예의범절에 까다롭고, 아버지가 엄격한 사람이라는 것.

 

아키하라는 여동생이 있고, 무척 어른스럽고, 항상 내 뒤를 따라오던 것.

 

넓은 저택이었기에 숲처럼 넓은 마당에서 항상 아키하와 함께 친구들과 놀았던 것.

 

다락방이 비밀 아지트였던 것. 끝말잇기를 잘 못하게 된 것. 키는 아직 앞으로도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좋아했던 병원 냄새가 어느새 싫어지게 된 것.

구름이 없는 푸른하늘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도, 보고 있으면 울고싶어지게 되는 것.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은 멋진 일이고, 그 억지 웃음이 서툰 의사 선생님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말로.

나는 열에 들뜬 것처럼 여러 일들을 얘기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미안해, 시키. 나 볼 일이 좀 있어서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여자는 떠나간다.

......'또 혼자가 되는 건가'하고 생각하자 외로워졌다.

 

「그럼 또 내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너도 병실로 돌아가서 의사가 하는 말 잘 지켜야 해」

 

「아――

여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떠나갔다.

 

「......또, 내일

또 내일, 오늘처럼 이야기 할 수 있다.

기쁘다. 사고 후 눈을 뜨고 처음으로 사람다운 감정이 돌아왔다.

 

오후가 되면 들판에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여자는 아오코라고 부르면 화를 냈다. 자신의 이름이 싫다고 했다.

고민한 끝에, 왠지 모르게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서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내 고민을 한 마디로 해결해주었다.

 

사고 후,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워진 나는 선생님 덕분에 조금씩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들판에 있을 때만큼은 원래의 나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은 정말로 어딘가의 학교 선생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선생님과 있으면 즐겁다. 중요한 것은 그런 단순한 것이었다.

 

「있지, 선생님. 저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살짝 놀래키고 싶어서 병원에서 가져온 나이프를 사용해 들판에 있는 나무를 잘랐다.

 

저 낙서 같은 선을 따라그어서 종이를 찢듯이 한가운데에서 절반을 잘라냈다.

 

「굉장하죠? 낙서가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단하게 자를 수 있어요. 이런 거, 다른 사람들은 못하잖아요

 

――――

선생님은 놀랐다.

나는 신이 나서 이번에는 나무 뿌리에 일직선으로 나있는 선을 따라 나이프를 밀어넣어,

 

「시키―!

달려온 선생님의 손에 찰싹 뺨을 맞았다.

 

「선......생님?

「그만둬. 넌 방금, 무척 경솔한 짓을 했어

 

선생님은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차없는 눈. 나쁜 사람을 벌하는 흔들림 없는 눈.

 

아아, 어쩜 이리도 바보 같을까.

너무나 이 시간이 즐거워서, 나는 스스로를 잊고 있었다.

 

이 낙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나는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가슴에 번지는 피같은 후회. 자신의 어리석음에 죽고싶었다.

저 나무는 단 한 그루만 남은, 이 들판이 숲이었을 무렵의 기록이었는데.

나는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그것을 의미 없이 망쳐버린 것이다.

 

「......죄송해요

깨닫고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건 비겁하고 남자답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후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시키

사뿐히 내려앉는 감각.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이프를 쥔 나를 끌어안았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응 뭐어, 확실히 시키는 혼날 짓을 했지만 그건 결코 너만이 잘못돼서가 아니야

「......? 잘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야......?

「맞아. 그래도 말이야, 시키. 그것보다도 지금 누군가가 너를 혼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될거야. 그래서 나는 너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봤어. 같은 인간으로서 타이르고, 화내고, 진심으로 때렸어. 힘 조절을 잘못했다면 내가 시키를 죽였을지도 모를 정도로, 진심으로

 

그 말은 정말로 무서웠다.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만약"이 아닌, 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게 만든 것이 무척이나 슬펐던 것이다.

 

「울지마, 시키. 나도 사과하지 않을거야. 네가 그 정도의 일을 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으니까. ......응. 그 대신, 시키는 나를 싫어해도 괜찮아

 

「......아니. 선생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래. 정말로, 다행이다. ......내가 너를 만난 건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선생님은 조용히 내 후회를 녹여주듯이 내가 보던 낙서에 관해 물었다.

선이 보이는 것을 얘기하자, 선생님은 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키, 네가 바라보는 건 현실이야. 결코 보여선 안 되는 것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그 선은 환상이 아닌, 너에게만 보이는 또다른 현실」

 

「......그렇구나. 그럼 역시 이상한 건 나 혼자구나

「그래, 넌 이상해. 그건 틀림없어

 

울컥하는 스스로를 참는다.

의사 선생님이 믿어주지 않았을 때보다 몇 배나 더 아파서 꺾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알고있던 일이다.

처음부터―자신이 있어서는 안 되는 아이라는 것은 눈이 떠졌을 때부터, 줄곧 줄곧 알고있었다.

 

「조급해하지 마. 그 비정상은 이상할 뿐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게 아냐. 도리가 통한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향할 수 있다― 이거, 내 경험이야. 아무리 바보같이 터무니없는 일이 찾아와도 지혜와 용기로 극복하는 게 우리 인간이야

 

교훈 그 첫 번째, 라고 부끄러운 듯이 선생님은 말했다.

이상하더라도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인 것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 것인가 라고.

 

「그러면 이 낙서도, 설명할 수 있어요......?

「물론이지. 사물에는 말야, 망가지기 쉬운 부분이 있어

 

「언젠가 망가질 우리들은, 망가지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아. 너의 눈은 그런 사물의 말로...... 다시 말하자면 미래를 보게 되어버리는 거야

「......미래를......본다고요?

 

「그래. 지금은 그 이상은 몰라도 돼. 만약 네가 그 흐름에 휩쓸리게 되는 때가 온다면, 필연적으로 나름의 이치를 알게 될거야

 

「......선생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맞아, 알면 안 돼. 지금 중요한 건 한 가지. 그 선은 절대 장난으로 잘라선 안 돼. ―너의 눈은, 사물의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만들어버리니까

 

「응. 선생님이 그렇다면 안 할게요. 그리고 왠지 가슴이 아파요. ......죄송해요, 선생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않을게요

 

「......다행이다. 시키, 지금 이 감정을 절대로 잊지 마. 그렇게 한다면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거야

 

끌어안고 있던 팔이 풀렸다. 차갑지만 따뜻했던 감촉이 멀어져간다.

 

「하지만 선생님. 이 낙서가 보이면 불안해요. 이 선을 그으면 끊어지잖아요? 그럼 제 주변은 항상 산산조각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할게. 아무래도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인 것 같으니까

 

선생님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태양처럼 방긋 미소지었다.

 

「시키. 내일 너에게 특별한 선물을 줄게. 내가 너를 예전의 삶으로 되돌려줄게

DAY-0 / 유리로 된 달 - 프롤로그

 

 

 

문득, 눈이 떠졌다.

 

모두가 잠든 무렵, 밤의 냉기에 눈꺼풀을 뜬다.

어두운 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익숙한 다다미와 장지문 냄새.

촘촘히 세공한 것 같은 하늘.

방구석에는 찐득하게 달라붙은 오래된 그림자.

그것은 음표 하나 없는 정적이며,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상실 중.

 

꼼짝 않고 선 채로, 멍하니 사람을 기다린다.

절멸한 소리 속에서 과거를 그린다.

꾸었던 꿈은, 만약의 이야기들 뿐이었다.

예를 들면,

 

만약, 하늘이 흐렸더라면.

만약, 깨닫는 것이 조금 빨랐더라면.

만약, 그가 쇠약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약――여기서, 당신이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줄곧 기다려도 끝은 오지 않는다.

밤은 더욱더 깊어져간다.

분명 이제,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혼자서는 무서우니까 모두를 만나고 싶어서,

홀로 마당으로 나갔다.

 

호 하고 내뱉는 숨이 하얗게 번져간다.

마당은 무척이나 손끝이 아플 정도로 추웠다.

얼어가는 별.

깊은 어둠.

하염없이 세계를 비추는 차가운 빛.

 

무성한 풀. 짓밟는 감촉. 감감무소식인 신발 소리.

저택의 마당은 무척 넓어서

주변은 깊은 어둠에 갇혀서.

숲의 나무들은 검고 검은

커다란 커튼 같았다.

 

마치 어딘가의 극장 같다.

가슴의 고동으로, 목이 메일 것 같다.

스윽 나무 꼭대기의 창문이 열리고,

곧, 연극이 시작되는건가 두근거렸다.

 

귓가에, 시끌시끌 벌레소리가 기어들어온다.

멀리서 다양한 소리가 난다.

검은 나무들로 된 커튼 안쪽.

숲 안쪽에서 모두가 즐거운 듯이 떠든다.

막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무척, 어둡다.

숲은 깊어서 차가운 빛도 닿지 않는다.

다양한 소리가 나고

다양한 것이 있다.

그러나 어두워서 잘 모르겠다.

도중에 누군가와 스쳐지나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차갑다.

안구 깊숙히 저릴 정도로 차가운 겨울.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좀 더 깊이 걸어갔다.

 

나무들의 베일을 빠져나간 뒤.

숲의 광장에는 모두가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흐트러진 모습.

모두 뿔뿔이 흩어진 손발.

한편 새빨간 숲의 광장.

 

                    ―――모르겠다.

 

저편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온다.

흉기를 손에 들고 다가온다.

모두를 그렇게 한 것처럼 나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싶은 것처럼.

 

―――잘 모르겠다.

 

멍하니 그 사람을 본다.

하릴없이 흉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나의 앞에 달려와서

대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어린애니까 잘 모르겠다.

 

철퍽.

따뜻한 것이 얼굴에 묻는다.

붉다.

토마토처럼 붉은 물.

조각조각난 사람.

그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 후로,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정말로 잘 모르겠지만.

그저 추워서.

나는 울 것만 같았다.

 

숲은 어두워서 보고싶지 않다.

땅은 붉어서 보고싶지 않다.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기로 했다.

 

―――하늘을 가리는 천개(天蓋)

 

눈에 따뜻한 심홍색이 섞여든다.

안구 깊숙이 스며든다.

하지만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

밤하늘에는, 그저 달이 홀로 떠있다.

 

―――밤을 여는 새하얀 얼굴

 

모르는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나를 조각내러 다가온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도 나는 멍하니

언제까지나 짙푸른 그림자를 올려다본다.

 

―――우아하고도 아름답게 낙하하는 별

 

무척 신기하다.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아―――오늘밤은 이렇게나

 

깨닫고보니 모르는 사람은 눈앞에.

소리도 없이, 쿵, 고통이 느껴졌다.

그것은 가슴 한가운데.

휘날려 춤추는 베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가 점점 사라져간다.

그 속에서 계속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아아―――눈치채지 못했다.

 

오늘밤은 이렇게나

 

달이, 아름답―――――다――――

07. 화원에서

 

"좋았어! 아름다워! 이 무슨 기적인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세상은! 설마 이런 결말이 있었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원만히 해결됐다. 그녀는 긴 성배탐색을 끝내고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다. 싸움에 지쳐 포기했던 것이 아냐. 그녀는 틀림없이 성배를 손에 넣었고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부정한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왕은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 멸망하기는 했어도 이 결말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 인생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그것을 마지막에 그녀가 받아들였다면 이제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가 목표로 했던 것. 네가 남긴 것. 네가... 나에게 주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보수다.

"그런데 그 고집 센 아가씨가 패배를 인정한 건 놀라운걸. 어지간히도 이상한 만남이 있었나보군. 나에게 보이는 것은 이 시대뿐이니 어떤 시대인지는 모르겠어. 적어도 미래라면 전말이 기대되겠는데."

'고마워요, 멀린.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때는 난처했지. 그런 아무래도 좋을 말이 이렇게 아프게 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것도 자업자득인가. 이제 볼 만큼 봤어. ...아니,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걸 봤군. 자, 가렴, 캐스팔루그. 나는 여기면 돼. 너는 자유롭게 정말로 아름다운 걸 느껴보도록 하려무나."

마술사는 아무런 감개도 없이 마지막 동거인을 창문으로 떠나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머나멀고 폐쇄된 감옥. 하지만 다른 세계의 어디보다도 꽃이 만발한, 변하지 않는 기억의 동산.

낙원의 정원, 가든 오브 아발론.

죽음을 잊은 남자는 여기서 별의 끝을 기다린다.

왕의 이야기는 이리하여 낙원의 끝에서 이야기 되었다.

6.5. 기사들의 이야기 - 베디비어

 

싸움은 끝나고 피처럼 붉던 석양도 저물어, 지금은 밤의 어둠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시체로 가득한 언덕 위를 기사는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기사의 손에는 고삐가 쥐어져 있고 상처입은 백마가 열심히 그를 뒤따랐다.

살아남은 것은 기사와 그 백마. 그리고 백마의 등에 쓰러져있는 한 명의 왕 뿐이었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저 숲에 도착하면 반드시...!"

기사는 피에 젖지 않은 숲을 향했다. 그는 왕의 불사성(不死性)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깨끗한 곳에 있으면 왕의 상처가 아물지 않을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움직이는 자는 아니다. 그는 이 왕에게야말로 검을 맡기고 힘이 되겠다고 맹세했으며, 애송이이면서도 왕의 시중역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정을 숨기고 공평무사하려 하는 왕. 가까이 가면 왕의 본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된 것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인 사실뿐. 저 왕이 스스로를 위해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사는 언젠가 이 왕의 얼굴에 빛이 들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 고독한 그대로였다.

그래서 기사는 왕의 죽음을 계속 부정했다.

 


 

도착한 숲에서 기사는 왕의 몸을 큰 나무에 기대게 했다.

"왕이시여, 금방 병사를 부르겠습니다. 부디 그동안 견뎌주시기를."

"...베디비어."

"...왕이시여! 의식이 돌아오신 겁니까?"

"응... 조금, 꿈을 꾸었다."

"꿈... 말입니까?"

"그래. 별로 꾼 적이 없어서 말이지. 귀중한 체험을 했어."

"그건...? 그럼, 신경쓰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저는 그 사이에 병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무언가 무례한 말이라도...?"

"아니, 그대의 말투에 놀랐어. 꿈은 눈을 뜬 뒤에도 보이는 것인가? 다른 꿈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 같은 꿈이 나타나는..."

"...예. 간절히 바라면 같은 꿈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적은 없다. 꿈이란 원래 한 번 끊어지면 연속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사는 거짓을 말했다. 이것이 왕에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정임을 사죄하며.

"그렇군. 그대는 박식하구나, 베디비어. ...베디비어, 나의 명검을 들도록. 알겠나, 이 숲을 빠져나가 저 피로 물든 언덕을 올라가라. 그러면 깊은 호수가 보일 것이다. 그곳에 나의 검을 던져 넣어라."

"와...왕이시여?! 그 말씀은..."

"가라. 일을 마친다면 여기로 돌아와 그대가 본 것을 전해다오."

그리하여 기사는 산길을 지났지만 검을 던지기를 주저했다. 기사는 왕을 위해 아까워하여 검을 버리지 못한 채 호수에서 발길을 돌려 왕의 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왕은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검을 버렸다고 말하는 기사에게 왕은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었다.

이제는 왕의 의지를 바꿀 수 없다고 깨달은 기사는 3번째가 되어서야 검을 호수로 던졌다. 성검은 호수로 돌아갔다.

산길을 빠져나갈 무렵, 숲은 아침 햇살을 받아 흐릿해져 있었다. 청아한 빛 속에 전장은 사라졌으며 피투성이었던 전장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호수에 검을 던져 넣었습니다. 호수의 부인이 검을 들고 갔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가슴을 펴도 좋다. 그대는, 그대의 왕의 명예를 지킨 것이다. 미안하다, 베디비어. ...이번 잠은 조금 길어질..."

"...보고 계십니까, 아서 왕. 꿈의 계속을..."

어둡던 하늘이 드높고 청명해졌다. 싸움은 이걸로 정말 끝난 것이다.

중얼거린 말은 바람에 흩날리고, 잠이 든 왕은 끝없는 푸르름에 잠기듯이 먼... 머나먼 꿈을 꾸었다.

06. 화원에서

 

"그랬지! 난 갇혀 있었지. 으음, 뭐 이런 울퉁불퉁한 감옥이 다 있담. 이걸 만든 술자는 분명 세심한 작업은 못 할 것 같네."

남자는 어깨에 얹었던 지팡이를 손에 쥐더니 그 윗부분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 순간 담의 구조가 더욱 견고해지고, 설령 세계가 끝난다해도 무너지지 않을 첨탑이 되었다.

출입구로 보이는 것은 없다. 이 탑은 이제 외계와는 관련되지 않는 전망대가 된 것이다.

마술사는 여기서 홀로 끝까지 자신의 죄를 지켜보는 길을, 아무렇지 않게 그저 즉흥적인 마음으로 골랐다.

남자는 바위에 앉아 창문을 보고 있다. 멸망한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어떤 상태에 빠진 것인지 남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하고 말았다. 브리튼의, 아니, 잃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 결과가 저것이다. 왕은 캄란의 언덕에 머무르며 죽음의 연못에서 온갖 시대에 소환돼 끊임없이 성배를 원하고 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그녀는 살아있으면서도 영령인 것이다. 그리고 성배를 손에 넣으면 계약은 성립된다. 

그녀는 사후 수호자로서 끝임없이 싸우게 되겠지.

그거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일만큼은 용인할 수 없었다.

그 소녀가 성배에 무엇을 바랄지는 추리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 반드시 선정의 날을 다시 시작하려 할 터.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짓이다. 아르토리아라는 소녀의 지금까지의 싸움, 고통을 없애버리고 마는 계약.

그 소원만큼은 인간이 아닌 마술사도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그녀의 성능을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배를 손에 넣겠지.

성배를 가지게 되면 그녀는 소원을 이룰 것이다.

구원도 없는 미래를 기다리는 건 이렇게나 괴로운 일이었나.

정원에 시간은 없지만 지금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1초 1초가 견딜 수 없이 영원하다고 느껴진다.

1초 1초가 눈을 돌리고 싶은 찰나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05. 캄란의 날

 

"대승리야!"

"이걸로 전쟁은 끝났어!"

"돌아가면 당장 밭을 갈아야겠네!"

"그래, 가족들이 기다린다고."

"로마와 조약을 맺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은 오지 않겠지."

"...!"

"모드레드 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일곱 호족, 여덟 제후는 반역에 찬동, 카멜롯이 함락되었답니다...!"

그것이 그녀가 쌓은 공훈의 보답이었다. 

모르건의 자식이자 아서 왕의 복제품인 원치 않는 아이, 모드레드.

그, 아니, 그녀는 아서 왕의 부재 동안 반란분자를 모아 카멜롯을 점령하고 귀환 중인 왕의 군대를 괴멸시키고자 해안선에 포진해 있었다.

후세에 불리리라. 아서 왕의 마지막 전투, 기사도가 내버려진 황혼의 전장, 많은 빛들이 사라진 시체들의 산.

캄란 언덕의 전투라고.

 


 

로마 원정에 지친 왕의 군사를 모드레드의 군대가 진형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 왕과 그 측근들이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브리튼에 남아있던 가웨인과 케이의 조력 덕분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국토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 과정 동안 철수와 추격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반역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드레드의 반역에 찬동한 병사들은 누구도 아서 왕을 증오하여 단결한 것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란, 지력이 약해지는 토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그들은 계속 견뎌왔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매번 호소했다.

"내일 이기기 위한 조치다. 다들 견뎌줬으면 한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해왔다. 왕은 정말 이상적인 왕이었다.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청렴결백하게 살기를 모두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반드시 풍요로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그 인내는 언제가 되면 끝나는 것인가.

"모두들 이미 한계였구나... 나만 혼자 아무렇지 않았어..."

이상적인 왕은, 그러나 이상적이었기에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이때 꺾였다는 것을.

 

7일째 아침. 전투는 캄란의 언덕에 도달했다. 양쪽 군대의 격돌은 해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아군도 적군도 대부분 전멸하고 이제 생존해 있는 자는 꼽을 수 있을 정도인 시체들로 된 산. 피투성이가 된 캄란의 언덕에서 그녀는 어느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 말을 인정하면서 그녀는 꺾인 마음을 일으켜세워 창을 쥐었다.

성검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녀의 마음이 꺾였을 때 지상의 별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전장에 남은 기사는 둘. 왕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형의 갑주를 입은 자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검, 클라렌트를 땅에 끄는 모습은 망령 그 자체였다. 나라를 빼앗고 병사를 죽이고 형태 없는 것에 굶주린 망령은 말한다.

 


 

"이제 끝을 낼 때가 됐군, 아서 왕."

"모드레드인가."

"...길었어. 여기 도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전장 속을 헤맸어. 어때? 당신의 나라는 이걸로 끝났어. 끝나버리고 말았어. 내가 이기든 당신이 이기든, 이젠 모든 게 멸망해버렸어. 어째서 내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를 자식이라 인정하지 않았나! ...어째서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했나! ......왜 대답하지 않지!?"

아서의 성창이 반역자의 복부를 꿰뚫고 쓰러뜨렸다. 반역자의 마검은 왕의 투구를 깨드렸고 두개골을 갈라 그 한쪽 눈과 여명을 빼앗았다.

아서 왕, 아르토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더는 의미가 없는 성검에 의지하여 언덕이 된 기사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누구도 본 적 없을 맨 얼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누르며, 슬픔에 호흡이 막히면서, 그녀는 브리튼의 종말을 내려다보고, 통곡했다.

"나는 많은 싸움을 일으키고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니 나는 누구보다도 비참히 죽으리라고, 누군가에게 증오를 받아 죽으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고통 받는 건 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리석은 왕 혼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아니야.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이런 끝을... 나는 추구하지 않았어! 브리튼이 끝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더 평화로운... 잠들 수 있을 끝이라 믿었는데! ...이건 아냐. 결단코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은 용인되어도 이 광경은 용인할 수 없다!"

실의의 밑바닥에 있는 그녀는 그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

'기회를 주겠다. 그 바람의 성취와 맞바꿔 그 사후를 가지고 싶다.'라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모를리 없었는데도. 그래도 왕은 의지하고 말았다.

이 멸망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원한들 상관없다고.

아아, 악랄한 기적이 그녀의 마음을 구원한다. 왕은 브리튼의 멸망을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구원을 거절했다.

왕의 성배탐색은 이때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래영겁 구원받을 수 없는 루프에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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