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일부러 언니네 사무소의 마안살을 빼앗아가며 만든 아오자키 아오코 혼신의 작품이니까. 함부로 다루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시키」
「응, 소중하게 다룰게요! 그런데 역시 선생님은 대단해! 그렇게나 싫었던 선이 모두 사라지다니, 왠지 마법 같아요, 이거!」
「그야 당연하지. 왜냐면 나, 마법사인걸」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선생님은 트렁크를 지면에 놓았다.
「하지만 시키. 그 선은 사라진 게 아냐. 단지 보이지 않게 한 것 뿐. 그 안경을 벗으면, 선은 다시 보일거야」
「보이지 않을 뿐?」
「응. 그것만은 치료할 수 없는 부분이야. 너는 그 눈과 어떻게든 타협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싫어. 이런 무서운 눈, 필요없어요. 또 선을 잘라버리면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잖아요」
「아아, 이제 두 번 다시 선을 자르지 않겠다고 했던 그거 말이지. 바보구나, 그런 약속 따윈 가볍게 깨뜨려도 돼」
「......그래요? 하지만 절대 하면 안 될 짓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해선 안 되는 짓이야. 하지만 그 눈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너만의 힘인걸. 그러니까 그걸 사용하는 건 너의 자유. 그 눈이 존재하는 것에 관해선, 너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너를 비난할 수 없어.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네가 그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 뿐이야, 시키」
「내가―――무엇을 하는가―――」
선생님은 내 눈을 들여다보듯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야. ......응, 역시 좋은 눈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귀찮은 일을 마주했네 싶었어. 왜냐면 너, 많은 걸 잃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문제 따윈 없었어. 너는 확실하게 살아있어. 그렇다면 인생을 걸고 만회하렴」
「―――――」
―――이 때의 가슴 속 빛을, 눈가까지 벅차오른 기쁨을, 나는 평생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너는 여기 있어도 돼"라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나를 긍정해주었다.
「시키. 너는 개인이 보유하는 능력 중에서도 엄청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말았어.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존재한다는 건,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거야. 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힘을 나눠주지 않아. 네 미래에는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오기 때문에 그 직사의 마안이 있다고 할 수 있어. 그건 잔인한 일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마. 너는 무척이나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금의 네가 있는 한, 그 눈은 결코 틀린 결과를 낳지 않을거야」
「성인(聖人)이 되어라, 라고는 하지 않을게. 너는 네가 올바르다고 믿는 어른이 되면 돼. 하면 안 되는 일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너라면, 10년 후에는 분명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거야」
선생님은 일어나더니 트렁크에 손을 뻗었다.
「아, 그래도 웬만하면 안경을 벗으면 안 돼. 특별한 힘은 특별한 힘을 부르는 법이니까. 자, 내가 건네는 충고, 그 두번째. 반칙을 쓸 타이밍과 승부를 걸 타이밍을 잘 생각하라.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만, 도저히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 안경을 벗고 잘 생각한 뒤에 힘을 행사하렴」
「그 힘 자체는 결코 나쁜 게 아니야. 결과를 좋게 만들지 나쁘게 만들지는 어디까지나 네 판단에 달렸으니까」
트렁크를 들어올린다.
――선생님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작별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무리예요, 선생님. 저 혼자서는 좋은 일로 만들 수 없어요. 실은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있어서, 저는 저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안 돼요. 선생님이 없으면 이런 안경이 있어도 안 될 게 뻔하잖아요......!」
「시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 것. 자기자신도 속일 수 없는 거짓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
선생님은 언짢은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이젠 괜찮다는 걸. 그렇다면 그런 시시한 말을 하면서 어렵게 되찾은 자신을 버려서는 안 돼」
「그럼 이제 작별이야. 바이, 시키. 어떤 인간이든 인생이란 함정 투성이야. 넌 그걸 헤쳐나갈 힘이 있으니까, 굳게 마음 먹으렴」
선생님은 가버린다.
너무나 슬펐지만 나는 선생님의 친구니까, 굳게 마음 먹고 배웅하기로 했다.
「――응. 안녕, 선생님」
「좋아, 잘했어 잘했어. 그 마음으로 항상 건강해야 해. 마지막 교훈. 위기일 때는 우선 침착한 뒤에 잘 생각해볼 것. 괜찮아. 너라면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테니까」
선생님은 기쁜 듯이 웃었다.
사아, 바람이 불었다. 풀숲이 일제히 흔들린다.
선생님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바이바이, 선생님」
그리 말하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겠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남은 것은 수많은 말과 이 신기한 안경 뿐.
단 7일 간의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배웠다.
멍하니 서 있었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얼마나 바보인가.
나는 작별인사만 했을 뿐.
고맙다는 한 마디를, 그 사람에게 전하지 못했다.
내 퇴원은 그로부터 금방 후였다.
퇴원한 후, 나는 토오노 가(家)에서가 아닌 다른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몸은 회복했지만 후유증이 남게 된 나는 토오노 가에 있어 불필요한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았어! 아름다워! 이 무슨 기적인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세상은! 설마 이런 결말이 있었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원만히 해결됐다. 그녀는 긴 성배탐색을 끝내고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다. 싸움에 지쳐 포기했던 것이 아냐. 그녀는 틀림없이 성배를 손에 넣었고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부정한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왕은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 멸망하기는 했어도 이 결말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 인생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그것을 마지막에 그녀가 받아들였다면 이제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가 목표로 했던 것. 네가 남긴 것. 네가... 나에게 주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보수다.
"그런데 그 고집 센 아가씨가 패배를 인정한 건 놀라운걸. 어지간히도 이상한 만남이 있었나보군. 나에게 보이는 것은 이 시대뿐이니 어떤 시대인지는 모르겠어. 적어도 미래라면 전말이 기대되겠는데."
'고마워요, 멀린.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때는 난처했지. 그런 아무래도 좋을 말이 이렇게 아프게 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것도 자업자득인가. 이제 볼 만큼 봤어. ...아니,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걸 봤군. 자, 가렴, 캐스팔루그. 나는 여기면 돼. 너는 자유롭게 정말로 아름다운 걸 느껴보도록 하려무나."
마술사는 아무런 감개도 없이 마지막 동거인을 창문으로 떠나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머나멀고 폐쇄된 감옥. 하지만 다른 세계의 어디보다도 꽃이 만발한, 변하지 않는 기억의 동산.
"모드레드 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일곱 호족, 여덟 제후는 반역에 찬동, 카멜롯이 함락되었답니다...!"
그것이 그녀가 쌓은 공훈의 보답이었다.
모르건의 자식이자 아서 왕의 복제품인 원치 않는 아이, 모드레드.
그, 아니, 그녀는 아서 왕의 부재 동안 반란분자를 모아 카멜롯을 점령하고 귀환 중인 왕의 군대를 괴멸시키고자 해안선에 포진해 있었다.
후세에 불리리라. 아서 왕의 마지막 전투, 기사도가 내버려진 황혼의 전장, 많은 빛들이 사라진 시체들의 산.
캄란 언덕의 전투라고.
로마 원정에 지친 왕의 군사를 모드레드의 군대가 진형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 왕과 그 측근들이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브리튼에 남아있던 가웨인과 케이의 조력 덕분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국토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 과정 동안 철수와 추격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반역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드레드의 반역에 찬동한 병사들은 누구도 아서 왕을 증오하여 단결한 것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란, 지력이 약해지는 토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그들은 계속 견뎌왔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매번 호소했다.
"내일 이기기 위한 조치다. 다들 견뎌줬으면 한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해왔다. 왕은 정말 이상적인 왕이었다.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청렴결백하게 살기를 모두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반드시 풍요로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그 인내는 언제가 되면 끝나는 것인가.
"모두들 이미 한계였구나... 나만 혼자 아무렇지 않았어..."
이상적인 왕은, 그러나 이상적이었기에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이때 꺾였다는 것을.
7일째 아침. 전투는 캄란의 언덕에 도달했다. 양쪽 군대의 격돌은 해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아군도 적군도 대부분 전멸하고 이제 생존해 있는 자는 꼽을 수 있을 정도인 시체들로 된 산. 피투성이가 된 캄란의 언덕에서 그녀는 어느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 말을 인정하면서 그녀는 꺾인 마음을 일으켜세워 창을 쥐었다.
성검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녀의 마음이 꺾였을 때 지상의 별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전장에 남은 기사는 둘. 왕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형의 갑주를 입은 자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검, 클라렌트를 땅에 끄는 모습은 망령 그 자체였다. 나라를 빼앗고 병사를 죽이고 형태 없는 것에 굶주린 망령은 말한다.
"이제 끝을 낼 때가 됐군, 아서 왕."
"모드레드인가."
"...길었어. 여기 도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전장 속을 헤맸어. 어때? 당신의 나라는 이걸로 끝났어. 끝나버리고 말았어. 내가 이기든 당신이 이기든, 이젠 모든 게 멸망해버렸어. 어째서 내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를 자식이라 인정하지 않았나! ...어째서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했나! ......왜 대답하지 않지!?"
아서의 성창이 반역자의 복부를 꿰뚫고 쓰러뜨렸다. 반역자의 마검은 왕의 투구를 깨드렸고 두개골을 갈라 그 한쪽 눈과 여명을 빼앗았다.
아서 왕, 아르토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더는 의미가 없는 성검에 의지하여 언덕이 된 기사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누구도 본 적 없을 맨 얼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누르며, 슬픔에 호흡이 막히면서, 그녀는 브리튼의 종말을 내려다보고, 통곡했다.
"나는 많은 싸움을 일으키고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니 나는 누구보다도 비참히 죽으리라고, 누군가에게 증오를 받아 죽으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고통 받는 건 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리석은 왕 혼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아니야.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이런 끝을... 나는 추구하지 않았어! 브리튼이 끝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더 평화로운... 잠들 수 있을 끝이라 믿었는데! ...이건 아냐. 결단코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은 용인되어도 이 광경은 용인할 수 없다!"
실의의 밑바닥에 있는 그녀는 그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
'기회를 주겠다. 그 바람의 성취와 맞바꿔 그 사후를 가지고 싶다.'라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모를리 없었는데도. 그래도 왕은 의지하고 말았다.
이 멸망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원한들 상관없다고.
아아, 악랄한 기적이 그녀의 마음을 구원한다. 왕은 브리튼의 멸망을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구원을 거절했다.
"우리쪽도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으니 용서 없이 날려버려야죠. 그 후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조건을 꺼내 화평을 약속받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하지만 브리튼은 언젠가 멸망할 나라야. 그렇다기 보다, 이미 멸망해 있어. ...라고 내가 말하면 넌 어떡할래?"
"평소 같은 농담이라고 화낼 겁니다. 브리튼은 멸망하지 않아요. 그걸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왔으니까요."
"그랬지. 최근에 자주 잊어먹는다니까. 나도 인간을 비웃을 수는 없겠군. ...음. 정말 조금 전의 일이었는데도 아주 먼 옛날 이야기 같아. 우서와 나는 이상적인 왕을 만들었어. 그건 잘 된 것 같아. 하지만 그 뒤는 예상대로 되지 않았어. 우리는 이상적인 왕을 목표로 했지. 너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던 거야. 그 차이를,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멀린?"
"괜찮아. 넌 그거면 돼."
"출항 시간이 됐군요."
"미안.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 좀 실수를 해서 말이야. 잠시 동안 몸을 숨겨야 하거든."
"여성 문제는 자중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점만은 몇 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군요."
"내 삶의 보람이니까 말이야. 꽃이 없으면 뭐가 인생이냐."
"정말이지..."
자랑스럽게 말하는 마술사에게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그렇다. 마술사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녀의 미소를 지켜봐왔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웃었던 적은 없다. 이 소녀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을 보고서야 기쁘게 웃는 것이다.
"고마워요, 멀린.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
"저는 당신과는 달리 이성과 관련된 적이 없어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표현이 안 되지만, 당신이 있어주었던 것, 당신이 저와 어울려 준 나날들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는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뺨을 붉히지도 않고, 소녀처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녀는 엉뚱한 생각을 성실하게 마음을 담아 얘기했다.
물론 그것이 사랑은 아니다.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그녀가 지금까지 전해들은 범주 내에서 가장 큰 감사를 엉뚱한 말로 전한 것뿐이다.
마지막 대화가 끝났다.
배는 왕을 태우고 황금의 바다로 나간다. 그것을 배웅하면서 마술사는 중얼거렸다.
"나는 인간의 사랑을 몰라. 아르토리아도 아직 인간의 사랑을 모르지.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대해 말하다니, 비인간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아니, 그것도 당연한 결과인가. 인간이 아닌 서로가 인간 흉내를 냈던 거야. 잘 맞았을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