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성배전쟁 최종국면. 일곱 계층을 이겨 온 승자 키시나미 하쿠노와 네로, 그들을 가로막는 트와이스, 세이비어와의 전투. (본 장면은 과거회상이므로 대사는 없고, 본편과는 확연히 다른 시간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X X X 카메라, SE.RA.PH의 중층(제5계층) 근처에서 위로 올라가 최상층, 치천의 우리(안젤리카 케이지)로. 그곳에는 게임판 최종보스인 각자(세이비어)와 홀로 싸우는 네로의 모습이. 세이비어는 태양과도 같이 네로의 위쪽에 군림한 채, 그 머리 위에는 후에 차크라 바르틴(대륜)이 되는 콜로니가 형성되고 있다. 네로는 공중에 있는 의사 영자를 발판 삼아 탕탕 뛰듯이 공중전을 하고있다. (네로의 발이 닿는 곳에 파문이 일어나고, 그 순간에만 발판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네로, 공중 높이 앉아있는 세이비어에게 육박하여 화염을 두른 검•원초의 불을 격렬하게 부딪쳐대도 세이비어에게는 닿지 않는다.네로는 이미 만신창이.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드레스도 너덜너덜한 상태.
하지만 그 눈동자는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승산 없는 전투를 전심전령으로 싸운다. 그 모습은 비장하다기 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분노로 가득 차 있다. X X X 그런 네로의 수백 미터 아래. 안젤리카 케이지로 이어지는 제7계층의 폐허신전에 주저앉아 하늘을 오려다보는 키시나미 하쿠노(게임판 여주인공)의 모습이 있다. 하쿠노는 이미 몸 반쪽이 사라진 상태. 절대 살 수가 없다. 트와이스는 치천의 우리에서 네로와 함께 싸우던 하쿠노의 숨통을 먼저 끊었다. 하쿠노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아래층인 7계층으로 떨어뜨리고, 거기다 두 다리를 파괴했다. 아무리 투지가 있더라도 절대로 기어오를 수 없도록.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하쿠노는 눈부신 듯이, 슬픈 듯이, 그저 홀로 싸우는 네로를 올려다보고 있다. X X X 네로와 세이비어의 전투가 최고조를 맞이한다. 네로의 일격도 세이비어의 인에 의해 막힌다. 세이비어의 보구, 천륜성왕(차크라 바르틴)은 하늘을 뒤덮고, 고리의 중심에 있는 땅 위의 네로를 향해 빛의 창을 일제히 날린다. 검으로는 버티지 못하고 발이 묶인 채로 못 박히듯 휩쓸리는 네로. 거기에 소천륜에 비치된 일곱 개의 무구 중 하나가 결정타를 날리듯이 쏘아진다. (차크라 바르틴의 보구명은 천륜성왕이지만, 그 원조인 각자는 전륜성왕이라는 다른 가능성도 갖고 있으며, 이 전륜성왕은 일곱 개의 무구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와 연관된 일곱 개의 "자비의 일격"이다) 이것은 광탄이 아닌 질량의 무기. 지표면을 가르는 미사일, 인도식 벙커버스터 같은 것이다. 네로는 이것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막아냈지만, 치천의 우리의 지면이 꿰뚫리며 SE.RA.PH를 낙하한다.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유성처럼 추락하는 네로. 그것을 지켜보고 숨이 끊어지는 하쿠노. 네로는 38만 킬로미터의 영자거리로 떨어져, 최하층...... 예선회장의 밑, SE.RA.PH의 바닥에 격돌했다. 대지의 구조체(스트럭처)와 표면(텍스처)을 날려버리고 드러난 흙덩이에 쓰러진 네로. 그 주변 지형은 네로를 묻은 크레이터가 된 채, 묘혈 같은 장소가 된다. 천공에서 애도의 종이 울려퍼진다. 그것은 차크라 바르틴의 대륜이 기동한 축가이기도 했다. (이 순간, 지금까지 거행되었던 모든 성배전쟁은 정지. SE.RA.PH는 문 셀의 손을 떠나게 된다) X X X 이상이 "990년 전의 싸움"의 끝. 이 싸움을 겪고 SE.RA.PH 내부는 여유가 없는, 죽음과 멸망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된다. 지금부터 잿빛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명확한 암시라고도 할 수 있다.
A파트
학원, 방과후의 교실 새빨간 교실에서의 회화. 붉은색과 검은색만으로 만들어진 세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삼인조. 교실에서 서로의 (마스터로 온)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리, 신지, 하쿠노. 얼굴이 분명하게 비치는 것은 하쿠노 뿐으로, 아마리와 신지의 얼굴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리 「저...... 그닥 제대로 된 이유는 없어요」 아마리의 입가는 상냥하고 온화하게 미소 짓는 형태이다. 아마리 「영자해커로서의 재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우수한 정도일 뿐이라」 신지 「그렇구만」 끄덕이는 신지. 하쿠노도 끄덕인다. (이 하쿠노의 기억은 실제로 신지 일행과 예선을 지나온 "신지의 친구"의 것) 신지 「나는 게임 챔피언이야. 그래서 여기에 온 거지. 세계 최고의 메인 프레임이 가동하는 게임은 세계 최고의 게임일 게 당연하잖아?」 아마리 「멋져요.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거군요」 아마리는 신지에게 철두철미 상냥하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연기하고 있을 뿐)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겨우 하쿠노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 사람 「그래서, 너(당신)는 무슨 이유 때문에?」 하쿠노 「———」 하쿠노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한순간, 그 얼굴에 데드 페이스가 떠오르고—— 그 순간, 카메라가 끊긴다.
학원•교실 / 수업 풍경
하쿠노의 시점. 하쿠노, 멍하니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딘가, 하늘 높은 곳에서 비행기가 날고있다. 제트음이 이명처럼 들린다. 평화로운 문명, 과도기를 연상시키는 광경.
CHECK▶ 게임판에서는 「사람들이 발사된 인공위성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의 빛나는 미래를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성은 날고있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고 있는 것. 그 사실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영원을 오인했다」고 말하는 장면.
나이 든 교사 「키시나미. 키시나미, 하쿠노——」 하쿠노 「———어?」 교사에게 호명되어 퍼뜩 정신을 차리는 하쿠노. 지금은 수업중이며, 하쿠노는 앉은 채로 멍하니 있던 듯하다. 하쿠노 「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특징 없는 대답이었지만 나약하진 않다. 분노의 심지는 주위에 숨기면서도 당당한 침착함을 가진 하쿠노의 목소리. 나이 든 교사 「지루한 수업인 건 알지만 중요하니까 잘 들어 두세요」 노교사의 지쳤지만 학생을 신경쓰는 목소리. 교실 안의 학생들이 킥킥 웃는다. 그 중에서도 친근하게 돌아보며 웃어대는 신지. 신지 「재난이었구만」 아마리 「그래도 수업중에 졸면 안 돼요」 친한 친구답게 웃는 신지와 곤란한 듯이 웃는 아마리. 하쿠노 「.........」 작게 끄덕이는 하쿠노. 수업이 재개되었다. 나이 든 교사 「즉, 서번트라는 건 인류사를 무기로써 이용한 획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사에 새겨진 영웅의 소환. 신화의 재현이라고도 할 압도적인 힘의 실체화」 「이 기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포토닉 순결정체——— 태양계 최고의 아티팩트인 양자 컴퓨터 『문 셀』입니다」 노교사가 서번트인가 뭔가를 설명한다. 생소한 수업 내용에 하쿠노는 눈을 꿈뻑거리며 교실을 관찰한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서기 2000년 무렵 일본의 고등학교의 교실 풍경. 그러나 교정에는 평범한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탑이 있고, 그곳에는 두 개의 이상한 전광표시가 있다. 하나는 붉은 문자로 카운트하는 시계. 시각을 표시하기 위함이 아닌, 시시각각 카운트다운 되고 있다. 하나는 거대한 출석표. 256명이나 되는 명찰이 탁탁 움직인다. 나이 든 교사 「실체화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물리적인 소환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곳은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름아닌, 달의 영자허구세계 SE.RA.PH」 「지상에서 접속•투영된 256의 혼이 담긴 전뇌체의 동산」 「물론 NPC도 존재합니다만」 「요컨대 이 칠천의 바다야말로 영령 소환에 최적화된 유일한 필드인 것입니다」
CHECK▶ 노교사가 말하는 내용은 여기서는 시청자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OK.
하쿠노도 흥미없는 듯 출석표를 바라보고 있다. 신지와 아마리를 비롯해 레오와 린, 라니와 트와이스, 댄이라는 각각의 이름. (참고로 키시나미 하쿠노의 이름은 없다. 그의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되는 것은 1화의 마지막 뿐이다) 나이 든 교사 「자, 이걸로 모든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학원생활을 후회하지 않게 보내길」
CHECK▶ 교사 나름의 이별의 말. 몇 번이나 반복 시뮬레이트된 『2030년부터 3029년까지 거듭해온 패자들에 의한, 질리지도 않는 패자의 예선』이지만, 그가 이 대사를 말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 그런데 NPC에 불과한 노교사이지만, 이번에도 또다시 "기록된 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학생들을 조금 감회 깊게 연민하여 말한 것.
나이 든 교사 「아아, 그리고 소각로에는 가까이 가지 마세요. 들어간 학생의 절반은 의미소실에서부터 자살로 빠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신지 「뭐라는거야, 선생. 고성소엔 어떤 부탁을 들어도 안 갈 거야」 나이 든 교사 「그렇죠. 그럼 여러분, 저는 이만」 노교사, 평온하게 웃으며 떠나간다.
수업 후 / 교실
노교사가 떠나고 학생들은 담소를 나누며 교실을 떠나간다. 책상에 앉은 채 타이밍을 놓친 하쿠노의 곁으로 신지와 아마리가 다가온다. 신지 「뭐냐, 또 혼자서 방과후를 보낼 셈이야?」 하쿠노 「글쎄」 평범한 반응을 하는 하쿠노. '신지가 나에게 권유하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신지 「완전 재미없는 놈이구만. 나참, 어쩔 수 없네. 내버려두면 넌 항상 혼자잖아. 여기선 관대한 내가...」 아마리 「오늘도 셋이서 느긋하게 점심. 맞죠?」 신지 「......뭐어, 응. 그런거지. 수업은 오전이면 끝나니까.」 쑥스러움에 말하지 못하던 속마음을 아마리에게 들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신지. 신지가 (선의의 행동일지라도) 자연스레 뾰족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을 아마리가 부드럽게 돕는다. 그런 관계인 두 사람이다. 하쿠노 「고마워」 하쿠노, 안도하는 표정. 이 둘이 자신의 친구라고, 이제서야 실감/공감이 되었기에. 아마리 「그래서, 어디로 가나요?」 신지 「아무데나. 식당이야 엄청 많잖아」 하쿠노, 두 사람이 재촉해서 밖으로. 교실은 베란다에서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다(복도는 필요 없습니다). 밖에 나오자, 그곳은 평범한 학원풍경이 아니다. 다른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 광대하고 다중구조의 학원도시가 거미줄처럼 통로(다리 모양의 것)으로 이어져있다.
「당연하지. 일부러 언니네 사무소의 마안살을 빼앗아가며 만든 아오자키 아오코 혼신의 작품이니까. 함부로 다루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시키」
「응, 소중하게 다룰게요! 그런데 역시 선생님은 대단해! 그렇게나 싫었던 선이 모두 사라지다니, 왠지 마법 같아요, 이거!」
「그야 당연하지. 왜냐면 나, 마법사인걸」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선생님은 트렁크를 지면에 놓았다.
「하지만 시키. 그 선은 사라진 게 아냐. 단지 보이지 않게 한 것 뿐. 그 안경을 벗으면, 선은 다시 보일거야」
「보이지 않을 뿐?」
「응. 그것만은 치료할 수 없는 부분이야. 너는 그 눈과 어떻게든 타협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싫어. 이런 무서운 눈, 필요없어요. 또 선을 잘라버리면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잖아요」
「아아, 이제 두 번 다시 선을 자르지 않겠다고 했던 그거 말이지. 바보구나, 그런 약속 따윈 가볍게 깨뜨려도 돼」
「......그래요? 하지만 절대 하면 안 될 짓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해선 안 되는 짓이야. 하지만 그 눈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너만의 힘인걸. 그러니까 그걸 사용하는 건 너의 자유. 그 눈이 존재하는 것에 관해선, 너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너를 비난할 수 없어.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네가 그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 뿐이야, 시키」
「내가―――무엇을 하는가―――」
선생님은 내 눈을 들여다보듯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야. ......응, 역시 좋은 눈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귀찮은 일을 마주했네 싶었어. 왜냐면 너, 많은 걸 잃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문제 따윈 없었어. 너는 확실하게 살아있어. 그렇다면 인생을 걸고 만회하렴」
「―――――」
―――이 때의 가슴 속 빛을, 눈가까지 벅차오른 기쁨을, 나는 평생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너는 여기 있어도 돼"라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나를 긍정해주었다.
「시키. 너는 개인이 보유하는 능력 중에서도 엄청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말았어.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존재한다는 건,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거야. 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힘을 나눠주지 않아. 네 미래에는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오기 때문에 그 직사의 마안이 있다고 할 수 있어. 그건 잔인한 일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마. 너는 무척이나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금의 네가 있는 한, 그 눈은 결코 틀린 결과를 낳지 않을거야」
「성인(聖人)이 되어라, 라고는 하지 않을게. 너는 네가 올바르다고 믿는 어른이 되면 돼. 하면 안 되는 일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너라면, 10년 후에는 분명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거야」
선생님은 일어나더니 트렁크에 손을 뻗었다.
「아, 그래도 웬만하면 안경을 벗으면 안 돼. 특별한 힘은 특별한 힘을 부르는 법이니까. 자, 내가 건네는 충고, 그 두번째. 반칙을 쓸 타이밍과 승부를 걸 타이밍을 잘 생각하라.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만, 도저히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 안경을 벗고 잘 생각한 뒤에 힘을 행사하렴」
「그 힘 자체는 결코 나쁜 게 아니야. 결과를 좋게 만들지 나쁘게 만들지는 어디까지나 네 판단에 달렸으니까」
트렁크를 들어올린다.
――선생님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작별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무리예요, 선생님. 저 혼자서는 좋은 일로 만들 수 없어요. 실은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있어서, 저는 저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안 돼요. 선생님이 없으면 이런 안경이 있어도 안 될 게 뻔하잖아요......!」
「시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 것. 자기자신도 속일 수 없는 거짓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
선생님은 언짢은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이젠 괜찮다는 걸. 그렇다면 그런 시시한 말을 하면서 어렵게 되찾은 자신을 버려서는 안 돼」
「그럼 이제 작별이야. 바이, 시키. 어떤 인간이든 인생이란 함정 투성이야. 넌 그걸 헤쳐나갈 힘이 있으니까, 굳게 마음 먹으렴」
선생님은 가버린다.
너무나 슬펐지만 나는 선생님의 친구니까, 굳게 마음 먹고 배웅하기로 했다.
「――응. 안녕, 선생님」
「좋아, 잘했어 잘했어. 그 마음으로 항상 건강해야 해. 마지막 교훈. 위기일 때는 우선 침착한 뒤에 잘 생각해볼 것. 괜찮아. 너라면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테니까」
선생님은 기쁜 듯이 웃었다.
사아, 바람이 불었다. 풀숲이 일제히 흔들린다.
선생님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바이바이, 선생님」
그리 말하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겠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남은 것은 수많은 말과 이 신기한 안경 뿐.
단 7일 간의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배웠다.
멍하니 서 있었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얼마나 바보인가.
나는 작별인사만 했을 뿐.
고맙다는 한 마디를, 그 사람에게 전하지 못했다.
내 퇴원은 그로부터 금방 후였다.
퇴원한 후, 나는 토오노 가(家)에서가 아닌 다른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몸은 회복했지만 후유증이 남게 된 나는 토오노 가에 있어 불필요한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았어! 아름다워! 이 무슨 기적인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세상은! 설마 이런 결말이 있었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원만히 해결됐다. 그녀는 긴 성배탐색을 끝내고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다. 싸움에 지쳐 포기했던 것이 아냐. 그녀는 틀림없이 성배를 손에 넣었고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부정한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왕은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 멸망하기는 했어도 이 결말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 인생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그것을 마지막에 그녀가 받아들였다면 이제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가 목표로 했던 것. 네가 남긴 것. 네가... 나에게 주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보수다.
"그런데 그 고집 센 아가씨가 패배를 인정한 건 놀라운걸. 어지간히도 이상한 만남이 있었나보군. 나에게 보이는 것은 이 시대뿐이니 어떤 시대인지는 모르겠어. 적어도 미래라면 전말이 기대되겠는데."
'고마워요, 멀린.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때는 난처했지. 그런 아무래도 좋을 말이 이렇게 아프게 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것도 자업자득인가. 이제 볼 만큼 봤어. ...아니,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걸 봤군. 자, 가렴, 캐스팔루그. 나는 여기면 돼. 너는 자유롭게 정말로 아름다운 걸 느껴보도록 하려무나."
마술사는 아무런 감개도 없이 마지막 동거인을 창문으로 떠나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머나멀고 폐쇄된 감옥. 하지만 다른 세계의 어디보다도 꽃이 만발한, 변하지 않는 기억의 동산.
"모드레드 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일곱 호족, 여덟 제후는 반역에 찬동, 카멜롯이 함락되었답니다...!"
그것이 그녀가 쌓은 공훈의 보답이었다.
모르건의 자식이자 아서 왕의 복제품인 원치 않는 아이, 모드레드.
그, 아니, 그녀는 아서 왕의 부재 동안 반란분자를 모아 카멜롯을 점령하고 귀환 중인 왕의 군대를 괴멸시키고자 해안선에 포진해 있었다.
후세에 불리리라. 아서 왕의 마지막 전투, 기사도가 내버려진 황혼의 전장, 많은 빛들이 사라진 시체들의 산.
캄란 언덕의 전투라고.
로마 원정에 지친 왕의 군사를 모드레드의 군대가 진형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 왕과 그 측근들이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브리튼에 남아있던 가웨인과 케이의 조력 덕분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국토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 과정 동안 철수와 추격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반역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드레드의 반역에 찬동한 병사들은 누구도 아서 왕을 증오하여 단결한 것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란, 지력이 약해지는 토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그들은 계속 견뎌왔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매번 호소했다.
"내일 이기기 위한 조치다. 다들 견뎌줬으면 한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해왔다. 왕은 정말 이상적인 왕이었다.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청렴결백하게 살기를 모두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반드시 풍요로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그 인내는 언제가 되면 끝나는 것인가.
"모두들 이미 한계였구나... 나만 혼자 아무렇지 않았어..."
이상적인 왕은, 그러나 이상적이었기에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이때 꺾였다는 것을.
7일째 아침. 전투는 캄란의 언덕에 도달했다. 양쪽 군대의 격돌은 해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아군도 적군도 대부분 전멸하고 이제 생존해 있는 자는 꼽을 수 있을 정도인 시체들로 된 산. 피투성이가 된 캄란의 언덕에서 그녀는 어느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 말을 인정하면서 그녀는 꺾인 마음을 일으켜세워 창을 쥐었다.
성검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녀의 마음이 꺾였을 때 지상의 별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전장에 남은 기사는 둘. 왕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형의 갑주를 입은 자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검, 클라렌트를 땅에 끄는 모습은 망령 그 자체였다. 나라를 빼앗고 병사를 죽이고 형태 없는 것에 굶주린 망령은 말한다.
"이제 끝을 낼 때가 됐군, 아서 왕."
"모드레드인가."
"...길었어. 여기 도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전장 속을 헤맸어. 어때? 당신의 나라는 이걸로 끝났어. 끝나버리고 말았어. 내가 이기든 당신이 이기든, 이젠 모든 게 멸망해버렸어. 어째서 내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를 자식이라 인정하지 않았나! ...어째서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했나! ......왜 대답하지 않지!?"
아서의 성창이 반역자의 복부를 꿰뚫고 쓰러뜨렸다. 반역자의 마검은 왕의 투구를 깨드렸고 두개골을 갈라 그 한쪽 눈과 여명을 빼앗았다.
아서 왕, 아르토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더는 의미가 없는 성검에 의지하여 언덕이 된 기사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누구도 본 적 없을 맨 얼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누르며, 슬픔에 호흡이 막히면서, 그녀는 브리튼의 종말을 내려다보고, 통곡했다.
"나는 많은 싸움을 일으키고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니 나는 누구보다도 비참히 죽으리라고, 누군가에게 증오를 받아 죽으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고통 받는 건 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리석은 왕 혼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아니야.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이런 끝을... 나는 추구하지 않았어! 브리튼이 끝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더 평화로운... 잠들 수 있을 끝이라 믿었는데! ...이건 아냐. 결단코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은 용인되어도 이 광경은 용인할 수 없다!"
실의의 밑바닥에 있는 그녀는 그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
'기회를 주겠다. 그 바람의 성취와 맞바꿔 그 사후를 가지고 싶다.'라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모를리 없었는데도. 그래도 왕은 의지하고 말았다.
이 멸망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원한들 상관없다고.
아아, 악랄한 기적이 그녀의 마음을 구원한다. 왕은 브리튼의 멸망을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구원을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