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지금은 오래된 고성소의 바닥————Praeteritus limbus vorago

 

예선 고성소

낙하하는 별의 꿈에, 누구나가 영원을 오인(誤認)했다.
거듭해 겹쳐지는 패자의 목소리. 죄업을 늘리는 승자의 무위.
기적은 없더라도, 「고성소의 바닥」에서 너를 기다리겠다.


아방게르 / SE.RA.PH 최상층 안젤리카 케이지

 
달의 성배전쟁 최종국면.
일곱 계층을 이겨 온 승자 키시나미 하쿠노와 네로, 그들을 가로막는 트와이스, 세이비어와의 전투. (본 장면은 과거회상이므로 대사는 없고, 본편과는 확연히 다른 시간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X X X
카메라, SE.RA.PH의 중층(제5계층) 근처에서
위로 올라가 최상층, 치천의 우리(안젤리카 케이지)로.
그곳에는 게임판 최종보스인 각자(세이비어)와 홀로 싸우는 네로의 모습이.
세이비어는 태양과도 같이 네로의 위쪽에 군림한 채, 그 머리 위에는 후에 차크라 바르틴(대륜)이 되는 콜로니가 형성되고 있다. 네로는 공중에 있는 의사 영자를 발판 삼아 탕탕 뛰듯이 공중전을 하고있다.
(네로의 발이 닿는 곳에 파문이 일어나고, 그 순간에만 발판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네로, 공중 높이 앉아있는 세이비어에게 육박하여 화염을 두른 검•원초의 불을 격렬하게 부딪쳐대도 세이비어에게는 닿지 않는다.네로는 이미 만신창이.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드레스도 너덜너덜한 상태.
 
하지만 그 눈동자는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승산 없는 전투를 전심전령으로 싸운다.
그 모습은 비장하다기 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분노로 가득 차 있다.
X X X
그런 네로의 수백 미터 아래.
안젤리카 케이지로 이어지는 제7계층의 폐허신전에 주저앉아 하늘을 오려다보는 키시나미 하쿠노(게임판 여주인공)의 모습이 있다.
하쿠노는 이미 몸 반쪽이 사라진 상태. 절대 살 수가 없다.
트와이스는 치천의 우리에서 네로와 함께 싸우던 하쿠노의 숨통을 먼저 끊었다. 하쿠노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아래층인 7계층으로 떨어뜨리고, 거기다 두 다리를 파괴했다. 아무리 투지가 있더라도 절대로 기어오를 수 없도록.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하쿠노는 눈부신 듯이, 슬픈 듯이,
그저 홀로 싸우는 네로를 올려다보고 있다.
X X X
네로와 세이비어의 전투가 최고조를 맞이한다.
네로의 일격도 세이비어의 인에 의해 막힌다.
세이비어의 보구, 천륜성왕(차크라 바르틴)은 하늘을 뒤덮고,
고리의 중심에 있는 땅 위의 네로를 향해 빛의 창을 일제히 날린다.
검으로는 버티지 못하고 발이 묶인 채로 못 박히듯 휩쓸리는 네로.
거기에 소천륜에 비치된 일곱 개의 무구 중 하나가 결정타를 날리듯이 쏘아진다.
(차크라 바르틴의 보구명은 천륜성왕이지만, 그 원조인 각자는 전륜성왕이라는 다른 가능성도 갖고 있으며, 이 전륜성왕은 일곱 개의 무구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와 연관된 일곱 개의 "자비의 일격"이다)
이것은 광탄이 아닌 질량의 무기.
지표면을 가르는 미사일, 인도식 벙커버스터 같은 것이다.
네로는 이것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막아냈지만, 치천의 우리의 지면이 꿰뚫리며 SE.RA.PH를 낙하한다.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유성처럼 추락하는 네로.
그것을 지켜보고 숨이 끊어지는 하쿠노.
네로는 38만 킬로미터의 영자거리로 떨어져, 최하층...... 예선회장의 밑, SE.RA.PH의 바닥에 격돌했다.
대지의 구조체(스트럭처)와 표면(텍스처)을 날려버리고 드러난 흙덩이에 쓰러진 네로.
그 주변 지형은 네로를 묻은 크레이터가 된 채, 묘혈 같은 장소가 된다.
천공에서 애도의 종이 울려퍼진다.
그것은 차크라 바르틴의 대륜이 기동한 축가이기도 했다.
(이 순간, 지금까지 거행되었던 모든 성배전쟁은 정지. SE.RA.PH는 문 셀의 손을 떠나게 된다)
X X X
이상이 "990년 전의 싸움"의 끝.
이 싸움을 겪고 SE.RA.PH 내부는 여유가 없는, 죽음과 멸망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된다. 지금부터 잿빛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명확한 암시라고도 할 수 있다.
 


A파트

 
학원, 방과후의 교실
새빨간 교실에서의 회화. 붉은색과 검은색만으로 만들어진 세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삼인조.
교실에서 서로의 (마스터로 온)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리, 신지, 하쿠노.
얼굴이 분명하게 비치는 것은 하쿠노 뿐으로, 아마리와 신지의 얼굴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리 「저...... 그닥 제대로 된 이유는 없어요」
아마리의 입가는 상냥하고 온화하게 미소 짓는 형태이다.
아마리 「영자해커로서의 재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우수한 정도일 뿐이라」
신지 「그렇구만」
끄덕이는 신지. 하쿠노도 끄덕인다. (이 하쿠노의 기억은 실제로 신지 일행과 예선을 지나온 "신지의 친구"의 것)
신지 「나는 게임 챔피언이야. 그래서 여기에 온 거지. 세계 최고의 메인 프레임이 가동하는 게임은 세계 최고의 게임일 게 당연하잖아?」
아마리 「멋져요.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거군요」
아마리는 신지에게 철두철미 상냥하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연기하고 있을 뿐)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겨우 하쿠노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 사람 「그래서, 너(당신)는 무슨 이유 때문에?」
하쿠노 「———」
하쿠노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한순간, 그 얼굴에 데드 페이스가 떠오르고——
그 순간, 카메라가 끊긴다.
 


학원교실 / 수업 풍경

 
하쿠노의 시점.
하쿠노, 멍하니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딘가, 하늘 높은 곳에서 비행기가 날고있다.
제트음이 이명처럼 들린다.
평화로운 문명, 과도기를 연상시키는 광경.


CHECK▶ 게임판에서는 「사람들이 발사된 인공위성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의 빛나는 미래를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성은 날고있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고 있는 것. 그 사실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영원을 오인했다」고 말하는 장면.


나이 든 교사 「키시나미. 키시나미, 하쿠노——」
하쿠노 「———어?」
교사에게 호명되어 퍼뜩 정신을 차리는 하쿠노.
지금은 수업중이며, 하쿠노는 앉은 채로 멍하니 있던 듯하다.
하쿠노 「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특징 없는 대답이었지만 나약하진 않다.
분노의 심지는 주위에 숨기면서도 당당한 침착함을 가진 하쿠노의 목소리.
나이 든 교사 「지루한 수업인 건 알지만 중요하니까 잘 들어 두세요」
노교사의 지쳤지만 학생을 신경쓰는 목소리.
교실 안의 학생들이 킥킥 웃는다. 그 중에서도 친근하게 돌아보며 웃어대는 신지.
신지 「재난이었구만」
아마리 「그래도 수업중에 졸면 안 돼요」
친한 친구답게 웃는 신지와 곤란한 듯이 웃는 아마리.
하쿠노 「.........」
작게 끄덕이는 하쿠노.
수업이 재개되었다.
나이 든 교사 「즉, 서번트라는 건 인류사를 무기로써 이용한 획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사에 새겨진 영웅의 소환. 신화의 재현이라고도 할 압도적인 힘의 실체화」
「이 기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포토닉 순결정체——— 태양계 최고의 아티팩트인 양자 컴퓨터 『문 셀』입니다」
노교사가 서번트인가 뭔가를 설명한다.
생소한 수업 내용에 하쿠노는 눈을 꿈뻑거리며 교실을 관찰한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서기 2000년 무렵 일본의 고등학교의 교실 풍경.
그러나 교정에는 평범한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탑이 있고, 그곳에는 두 개의 이상한 전광표시가 있다.
하나는 붉은 문자로 카운트하는 시계.
시각을 표시하기 위함이 아닌, 시시각각 카운트다운 되고 있다.
하나는 거대한 출석표. 256명이나 되는 명찰이 탁탁 움직인다.
나이 든 교사 「실체화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물리적인 소환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곳은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름아닌, 달의 영자허구세계 SE.RA.PH」
「지상에서 접속•투영된 256의 혼이 담긴 전뇌체의 동산」
「물론 NPC도 존재합니다만」
「요컨대 이 칠천의 바다야말로 영령 소환에 최적화된 유일한 필드인 것입니다」


CHECK▶ 노교사가 말하는 내용은 여기서는 시청자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OK.


하쿠노도 흥미없는 듯 출석표를 바라보고 있다.
신지와 아마리를 비롯해 레오와 린, 라니와 트와이스, 댄이라는 각각의 이름.
(참고로 키시나미 하쿠노의 이름은 없다. 그의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되는 것은 1화의 마지막 뿐이다)
나이 든 교사 「자, 이걸로 모든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학원생활을 후회하지 않게 보내길」


CHECK▶ 교사 나름의 이별의 말. 몇 번이나 반복 시뮬레이트된 『2030년부터 3029년까지 거듭해온 패자들에 의한, 질리지도 않는 패자의 예선』이지만, 그가 이 대사를 말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 그런데 NPC에 불과한 노교사이지만, 이번에도 또다시 "기록된 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학생들을 조금 감회 깊게 연민하여 말한 것.


나이 든 교사 「아아, 그리고 소각로에는 가까이 가지 마세요. 들어간 학생의 절반은 의미소실에서부터 자살로 빠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신지 「뭐라는거야, 선생. 고성소엔 어떤 부탁을 들어도 안 갈 거야」
나이 든 교사 「그렇죠. 그럼 여러분, 저는 이만」
노교사, 평온하게 웃으며 떠나간다.
 


수업 후 / 교실

 
노교사가 떠나고 학생들은 담소를 나누며 교실을 떠나간다.
책상에 앉은 채 타이밍을 놓친 하쿠노의 곁으로 신지와 아마리가 다가온다.
신지 「뭐냐, 또 혼자서 방과후를 보낼 셈이야?」
하쿠노 「글쎄」
평범한 반응을 하는 하쿠노. '신지가 나에게 권유하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신지 「완전 재미없는 놈이구만. 나참, 어쩔 수 없네. 내버려두면 넌 항상 혼자잖아. 여기선 관대한 내가...」
아마리
「오늘도 셋이서 느긋하게 점심. 맞죠?」
신지
「......뭐어, 응. 그런거지. 수업은 오전이면 끝나니까.」
쑥스러움에 말하지 못하던 속마음을 아마리에게 들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신지.
신지가 (선의의 행동일지라도) 자연스레 뾰족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을 아마리가 부드럽게 돕는다. 그런 관계인 두 사람이다.
하쿠노
「고마워」
하쿠노, 안도하는 표정.
이 둘이 자신의 친구라고, 이제서야 실감/공감이 되었기에.
아마리 「그래서, 어디로 가나요?」
신지
「아무데나. 식당이야 엄청 많잖아」
하쿠노, 두 사람이 재촉해서 밖으로.
교실은 베란다에서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다(복도는 필요 없습니다).
밖에 나오자, 그곳은 평범한 학원풍경이 아니다.
다른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 광대하고 다중구조의 학원도시가 거미줄처럼 통로(다리 모양의 것)으로 이어져있다.

07. 화원에서

 

"좋았어! 아름다워! 이 무슨 기적인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세상은! 설마 이런 결말이 있었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원만히 해결됐다. 그녀는 긴 성배탐색을 끝내고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다. 싸움에 지쳐 포기했던 것이 아냐. 그녀는 틀림없이 성배를 손에 넣었고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부정한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왕은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 멸망하기는 했어도 이 결말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 인생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그것을 마지막에 그녀가 받아들였다면 이제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가 목표로 했던 것. 네가 남긴 것. 네가... 나에게 주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보수다.

"그런데 그 고집 센 아가씨가 패배를 인정한 건 놀라운걸. 어지간히도 이상한 만남이 있었나보군. 나에게 보이는 것은 이 시대뿐이니 어떤 시대인지는 모르겠어. 적어도 미래라면 전말이 기대되겠는데."

'고마워요, 멀린.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때는 난처했지. 그런 아무래도 좋을 말이 이렇게 아프게 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것도 자업자득인가. 이제 볼 만큼 봤어. ...아니,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걸 봤군. 자, 가렴, 캐스팔루그. 나는 여기면 돼. 너는 자유롭게 정말로 아름다운 걸 느껴보도록 하려무나."

마술사는 아무런 감개도 없이 마지막 동거인을 창문으로 떠나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머나멀고 폐쇄된 감옥. 하지만 다른 세계의 어디보다도 꽃이 만발한, 변하지 않는 기억의 동산.

낙원의 정원, 가든 오브 아발론.

죽음을 잊은 남자는 여기서 별의 끝을 기다린다.

왕의 이야기는 이리하여 낙원의 끝에서 이야기 되었다.

6.5. 기사들의 이야기 - 베디비어

 

싸움은 끝나고 피처럼 붉던 석양도 저물어, 지금은 밤의 어둠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시체로 가득한 언덕 위를 기사는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기사의 손에는 고삐가 쥐어져 있고 상처입은 백마가 열심히 그를 뒤따랐다.

살아남은 것은 기사와 그 백마. 그리고 백마의 등에 쓰러져있는 한 명의 왕 뿐이었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저 숲에 도착하면 반드시...!"

기사는 피에 젖지 않은 숲을 향했다. 그는 왕의 불사성(不死性)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깨끗한 곳에 있으면 왕의 상처가 아물지 않을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움직이는 자는 아니다. 그는 이 왕에게야말로 검을 맡기고 힘이 되겠다고 맹세했으며, 애송이이면서도 왕의 시중역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정을 숨기고 공평무사하려 하는 왕. 가까이 가면 왕의 본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된 것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인 사실뿐. 저 왕이 스스로를 위해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사는 언젠가 이 왕의 얼굴에 빛이 들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 고독한 그대로였다.

그래서 기사는 왕의 죽음을 계속 부정했다.

 


 

도착한 숲에서 기사는 왕의 몸을 큰 나무에 기대게 했다.

"왕이시여, 금방 병사를 부르겠습니다. 부디 그동안 견뎌주시기를."

"...베디비어."

"...왕이시여! 의식이 돌아오신 겁니까?"

"응... 조금, 꿈을 꾸었다."

"꿈... 말입니까?"

"그래. 별로 꾼 적이 없어서 말이지. 귀중한 체험을 했어."

"그건...? 그럼, 신경쓰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저는 그 사이에 병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무언가 무례한 말이라도...?"

"아니, 그대의 말투에 놀랐어. 꿈은 눈을 뜬 뒤에도 보이는 것인가? 다른 꿈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 같은 꿈이 나타나는..."

"...예. 간절히 바라면 같은 꿈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적은 없다. 꿈이란 원래 한 번 끊어지면 연속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사는 거짓을 말했다. 이것이 왕에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정임을 사죄하며.

"그렇군. 그대는 박식하구나, 베디비어. ...베디비어, 나의 명검을 들도록. 알겠나, 이 숲을 빠져나가 저 피로 물든 언덕을 올라가라. 그러면 깊은 호수가 보일 것이다. 그곳에 나의 검을 던져 넣어라."

"와...왕이시여?! 그 말씀은..."

"가라. 일을 마친다면 여기로 돌아와 그대가 본 것을 전해다오."

그리하여 기사는 산길을 지났지만 검을 던지기를 주저했다. 기사는 왕을 위해 아까워하여 검을 버리지 못한 채 호수에서 발길을 돌려 왕의 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왕은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검을 버렸다고 말하는 기사에게 왕은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었다.

이제는 왕의 의지를 바꿀 수 없다고 깨달은 기사는 3번째가 되어서야 검을 호수로 던졌다. 성검은 호수로 돌아갔다.

산길을 빠져나갈 무렵, 숲은 아침 햇살을 받아 흐릿해져 있었다. 청아한 빛 속에 전장은 사라졌으며 피투성이었던 전장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호수에 검을 던져 넣었습니다. 호수의 부인이 검을 들고 갔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가슴을 펴도 좋다. 그대는, 그대의 왕의 명예를 지킨 것이다. 미안하다, 베디비어. ...이번 잠은 조금 길어질..."

"...보고 계십니까, 아서 왕. 꿈의 계속을..."

어둡던 하늘이 드높고 청명해졌다. 싸움은 이걸로 정말 끝난 것이다.

중얼거린 말은 바람에 흩날리고, 잠이 든 왕은 끝없는 푸르름에 잠기듯이 먼... 머나먼 꿈을 꾸었다.

06. 화원에서

 

"그랬지! 난 갇혀 있었지. 으음, 뭐 이런 울퉁불퉁한 감옥이 다 있담. 이걸 만든 술자는 분명 세심한 작업은 못 할 것 같네."

남자는 어깨에 얹었던 지팡이를 손에 쥐더니 그 윗부분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 순간 담의 구조가 더욱 견고해지고, 설령 세계가 끝난다해도 무너지지 않을 첨탑이 되었다.

출입구로 보이는 것은 없다. 이 탑은 이제 외계와는 관련되지 않는 전망대가 된 것이다.

마술사는 여기서 홀로 끝까지 자신의 죄를 지켜보는 길을, 아무렇지 않게 그저 즉흥적인 마음으로 골랐다.

남자는 바위에 앉아 창문을 보고 있다. 멸망한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어떤 상태에 빠진 것인지 남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하고 말았다. 브리튼의, 아니, 잃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 결과가 저것이다. 왕은 캄란의 언덕에 머무르며 죽음의 연못에서 온갖 시대에 소환돼 끊임없이 성배를 원하고 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그녀는 살아있으면서도 영령인 것이다. 그리고 성배를 손에 넣으면 계약은 성립된다. 

그녀는 사후 수호자로서 끝임없이 싸우게 되겠지.

그거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일만큼은 용인할 수 없었다.

그 소녀가 성배에 무엇을 바랄지는 추리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 반드시 선정의 날을 다시 시작하려 할 터.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짓이다. 아르토리아라는 소녀의 지금까지의 싸움, 고통을 없애버리고 마는 계약.

그 소원만큼은 인간이 아닌 마술사도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그녀의 성능을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배를 손에 넣겠지.

성배를 가지게 되면 그녀는 소원을 이룰 것이다.

구원도 없는 미래를 기다리는 건 이렇게나 괴로운 일이었나.

정원에 시간은 없지만 지금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1초 1초가 견딜 수 없이 영원하다고 느껴진다.

1초 1초가 눈을 돌리고 싶은 찰나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05. 캄란의 날

 

"대승리야!"

"이걸로 전쟁은 끝났어!"

"돌아가면 당장 밭을 갈아야겠네!"

"그래, 가족들이 기다린다고."

"로마와 조약을 맺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은 오지 않겠지."

"...!"

"모드레드 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일곱 호족, 여덟 제후는 반역에 찬동, 카멜롯이 함락되었답니다...!"

그것이 그녀가 쌓은 공훈의 보답이었다. 

모르건의 자식이자 아서 왕의 복제품인 원치 않는 아이, 모드레드.

그, 아니, 그녀는 아서 왕의 부재 동안 반란분자를 모아 카멜롯을 점령하고 귀환 중인 왕의 군대를 괴멸시키고자 해안선에 포진해 있었다.

후세에 불리리라. 아서 왕의 마지막 전투, 기사도가 내버려진 황혼의 전장, 많은 빛들이 사라진 시체들의 산.

캄란 언덕의 전투라고.

 


 

로마 원정에 지친 왕의 군사를 모드레드의 군대가 진형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 왕과 그 측근들이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브리튼에 남아있던 가웨인과 케이의 조력 덕분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국토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 과정 동안 철수와 추격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반역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드레드의 반역에 찬동한 병사들은 누구도 아서 왕을 증오하여 단결한 것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란, 지력이 약해지는 토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그들은 계속 견뎌왔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매번 호소했다.

"내일 이기기 위한 조치다. 다들 견뎌줬으면 한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해왔다. 왕은 정말 이상적인 왕이었다.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청렴결백하게 살기를 모두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반드시 풍요로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그 인내는 언제가 되면 끝나는 것인가.

"모두들 이미 한계였구나... 나만 혼자 아무렇지 않았어..."

이상적인 왕은, 그러나 이상적이었기에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이때 꺾였다는 것을.

 

7일째 아침. 전투는 캄란의 언덕에 도달했다. 양쪽 군대의 격돌은 해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아군도 적군도 대부분 전멸하고 이제 생존해 있는 자는 꼽을 수 있을 정도인 시체들로 된 산. 피투성이가 된 캄란의 언덕에서 그녀는 어느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 말을 인정하면서 그녀는 꺾인 마음을 일으켜세워 창을 쥐었다.

성검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녀의 마음이 꺾였을 때 지상의 별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전장에 남은 기사는 둘. 왕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형의 갑주를 입은 자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검, 클라렌트를 땅에 끄는 모습은 망령 그 자체였다. 나라를 빼앗고 병사를 죽이고 형태 없는 것에 굶주린 망령은 말한다.

 


 

"이제 끝을 낼 때가 됐군, 아서 왕."

"모드레드인가."

"...길었어. 여기 도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전장 속을 헤맸어. 어때? 당신의 나라는 이걸로 끝났어. 끝나버리고 말았어. 내가 이기든 당신이 이기든, 이젠 모든 게 멸망해버렸어. 어째서 내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를 자식이라 인정하지 않았나! ...어째서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했나! ......왜 대답하지 않지!?"

아서의 성창이 반역자의 복부를 꿰뚫고 쓰러뜨렸다. 반역자의 마검은 왕의 투구를 깨드렸고 두개골을 갈라 그 한쪽 눈과 여명을 빼앗았다.

아서 왕, 아르토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더는 의미가 없는 성검에 의지하여 언덕이 된 기사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누구도 본 적 없을 맨 얼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누르며, 슬픔에 호흡이 막히면서, 그녀는 브리튼의 종말을 내려다보고, 통곡했다.

"나는 많은 싸움을 일으키고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니 나는 누구보다도 비참히 죽으리라고, 누군가에게 증오를 받아 죽으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고통 받는 건 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리석은 왕 혼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아니야.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이런 끝을... 나는 추구하지 않았어! 브리튼이 끝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더 평화로운... 잠들 수 있을 끝이라 믿었는데! ...이건 아냐. 결단코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은 용인되어도 이 광경은 용인할 수 없다!"

실의의 밑바닥에 있는 그녀는 그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

'기회를 주겠다. 그 바람의 성취와 맞바꿔 그 사후를 가지고 싶다.'라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모를리 없었는데도. 그래도 왕은 의지하고 말았다.

이 멸망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원한들 상관없다고.

아아, 악랄한 기적이 그녀의 마음을 구원한다. 왕은 브리튼의 멸망을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구원을 거절했다.

왕의 성배탐색은 이때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래영겁 구원받을 수 없는 루프에 떨어진 것이다.

04. 출항

 

엄숙한 새벽이었다. 항구는 대선단(大船團)의 출발 준비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녀와 마술사는 그런 사람들의 소란과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다.

 


 

"드디어 로마 원정인가..."

"네. 우선 선제 공격 후 교섭할 생각입니다."

"정말이지. 지기 싫어하는 건 변함없네."

"우리쪽도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으니 용서 없이 날려버려야죠. 그 후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조건을 꺼내 화평을 약속받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하지만 브리튼은 언젠가 멸망할 나라야. 그렇다기 보다, 이미 멸망해 있어. ...라고 내가 말하면 넌 어떡할래?"

"평소 같은 농담이라고 화낼 겁니다. 브리튼은 멸망하지 않아요. 그걸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왔으니까요."

"그랬지. 최근에 자주 잊어먹는다니까. 나도 인간을 비웃을 수는 없겠군. ...음. 정말 조금 전의 일이었는데도 아주 먼 옛날 이야기 같아. 우서와 나는 이상적인 왕을 만들었어. 그건 잘 된 것 같아. 하지만 그 뒤는 예상대로 되지 않았어. 우리는 이상적인 왕을 목표로 했지. 너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던 거야. 그 차이를,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멀린?"

"괜찮아. 넌 그거면 돼."

"출항 시간이 됐군요."

"미안.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 좀 실수를 해서 말이야. 잠시 동안 몸을 숨겨야 하거든."

"여성 문제는 자중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점만은 몇 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군요."

"내 삶의 보람이니까 말이야. 꽃이 없으면 뭐가 인생이냐."

"정말이지..."

자랑스럽게 말하는 마술사에게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그렇다. 마술사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녀의 미소를 지켜봐왔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웃었던 적은 없다. 이 소녀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을 보고서야 기쁘게 웃는 것이다.

"고마워요, 멀린.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

"저는 당신과는 달리 이성과 관련된 적이 없어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표현이 안 되지만, 당신이 있어주었던 것, 당신이 저와 어울려 준 나날들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는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뺨을 붉히지도 않고, 소녀처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녀는 엉뚱한 생각을 성실하게 마음을 담아 얘기했다.

물론 그것이 사랑은 아니다.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그녀가 지금까지 전해들은 범주 내에서 가장 큰 감사를 엉뚱한 말로 전한 것뿐이다.

마지막 대화가 끝났다. 

배는 왕을 태우고 황금의 바다로 나간다. 그것을 배웅하면서 마술사는 중얼거렸다.

"나는 인간의 사랑을 몰라. 아르토리아도 아직 인간의 사랑을 모르지.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대해 말하다니, 비인간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아니, 그것도 당연한 결과인가. 인간이 아닌 서로가 인간 흉내를 냈던 거야. 잘 맞았을 리가 없지."

3.5. 기사들의 이야기 - 란슬롯

 

영지의 성으로 돌아가 내 침실에 들어가자 왕비는 잠들어 있었다. 그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알지 못한다. 왕비가 얼마나 왕을 사모하고 보좌해 왔는지를.

배신, 부정의 오명을 뒤집어쓴 왕비의 마음은 가련한 소녀 그 자체다. 그녀는 지금도 꿈속에서 왕에게 거듭 사과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갑주 차림 그대로 침대에 앉았다. 최소한의 충의로써 그 분이 로마 원정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갑옷을 벗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밤은 길다. 나는 왕비에게 들은 왕의 반평생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자는 극히 일부였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철로 자신을 뒤덮어 방해가 될 것을 봉인했다.

물론 왕의 모습에 의심을 품은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검을 가진 왕은 상처 입지 않고 나이를 먹지도 않는다. 성검에는 호수의 요정의 가호가 있어 가진 자를 불로불사로 만든다고 한다.

사실상, 왕은 무적이었다. 그래서 진실로 왕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궁하는 자는 없었다.

나는 이국의 기사다. 사랑하는 여성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면 나라를 버리고서라도 그 손을 잡는 것이 프랑스 기사의 신조였다.

그것 때문에 떳떳치 못한 경험도 했지만, 그 덕분에 냉정히 원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렇게 말하며 트리스탄 경이 떠난 뒤, 왕의 피로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왕비는 왕을 걱정했고 나도 왕이 동요할 것을 걱정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왕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왕비의 고독을 알게 됐으며, 자신의 미숙함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를 지배한 것은 분노였다. 그것은 깨끗한 모든 것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그때 브리튼 그 자체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 것이다.

비서관까지 올라간 기사, 아그라베인은 왕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그걸 이용하여 왕비를 협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비가 모욕 당한 것이 나에게 최후의 결단을 내리게 했다. 나는 많은 기사들을 베고, 동료들의 목숨을 빼앗아, 자신의 영지로 도망쳤다.

나는 부정을 저지른 배신자이자 기사를 칭하는 것조차 우스운 짐승으로 전락했다. 

'그거면 됐다'고 마음속에서 외치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얻었으니까.

하지만 왕은 '용서한다'고 말했다.

'나의 벗, 나의 긍지, 나의 이상의 기사여. 귀공이 한 일이라면 반드시 연유가 있을 터.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그렇게 쓰여진 면죄부를 봤을 때, 나는 자신의 영혼이 미치고 곯아 썩게 되는 결말을 예감했다.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왕은 진심으로 용서했다. 축복해 주었다. 나와 왕비를.

만약 내가 왕의 입장이었다면 배신자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전제는 틀렸다. 왕은 처음부터 우리와는 다르다. 인간이 아닌 데다, 인간으로 자라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사람으로서 올바르고자 한다.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모르는 자가 사람들의 행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괴물이다. 보티건에 필적하는 괴물이다.

그렇다. 도망친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왕을 존경하고 경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간으로서 용인할 수가 없다. 해서는 안 된다.

그 삶의 방식을 '훌륭하다'는 말로 끝내버리면, 그것이야말로 성을 버린 기사와 다를 게 없다.

지금 가슴 속에 생긴 공포는 언젠가 분노가 되어, 증오가 되어, 영원히 이상적으로 있을 저 왕을 계속하여 저주할 터.

불길한 미래지만 나 같은 남자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응보인 것이다.

03. 낙양

 

카멜롯 성이 완성되고 원탁의 자리가 채워졌으며, 왕은 기네비어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기네비어 왕비는 진상을 알면서도 왕을 잘 보필하며 왕비로서 행동했다.

원탁의 기사 이야기가 꽃피는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사실 아무리 브리튼이 황폐해져도 카멜롯만은 계속 웃음과 희망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서 왕의 위광이라 믿었고, 기사들은 자신들의 노력의 결실이라 자랑했으며, 왕은 홀로 현실을 마주하고 고뇌하고 있었다.

영원히 피어있는 꽃은 없다. 카멜롯의 위광은 건재하더라도 브리튼은 쇠퇴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면 국토의 황폐화는 이민족들의 침공 때문만이 아니란 뜻입니까?"

"유감이지만 말야. 이 섬은 본토에서 떨어진 이방이야. 서력(西歷)이 되어 신비가 사라져가는 이 행성에서 아직까지 짙은 신(神)대의 공기가 남아 있어. 픽트족이나 용, 몽마가 실존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리고 브리튼인들도 이 부류에 속하지."

"백성들도 그렇다는 겁니까."

"침략은 이민족만의 문제가 아니야. 토지 그 자체가 변하고 있어. 흉작은 너희들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거야."

"다른 생활 방식을 모색하라? 외래종을 심고 다른 피를 받아들여 섬의 존재 방식을 바꾸라는 겁니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이야."

"...어찌됐든 시간이 필요합니다. 유지하든 변화하든, 모든 것은 이민족의 침공을 막고 나서입니다."

"승산은 있는 거야? 아서 왕."

"물론입니다."

 

"안장을 준비해 주십시오. 브리튼을 짓밟는 외적, 그 모든 것을 섬멸하겠다."

 


 

아서 왕이 달려나갔던 열두 번의 전투, 그 종반. 운명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군사 회의가 없는 날이 없었고 야영하지 않는 밤이 없었다. 항상 그녀가 선두에 섰던 것은 결의를 표명하기 위해서였을까.

전투에 나서기 위해서는 수많은 백성을 내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에 나선 후에는 모든 적을 베어버려야만 했다.

섬을 지키는 전투를 위해 작은 마을을 징발하여 군비를 모으는 일은 흔했다.

"내일을 이기기 위한 조치다. 모두들 참아주길 바란다."

그녀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원한을 받은 기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망설임은 없다. 옥좌에 몸을 맡길 때조차 근심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일도 없다.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을 지킬 수 없다. 그 맹세를 그녀는 엄격히 지켜갔다.

그리고 몇 번의 승리 후, '아서 왕은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고 원탁의 기사 한 명이 그리 말하며 떠났다.

거기다 몇 명인가 이름 있는 기사들이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조차도 왕은 당연한 일이라 받아들이고 통치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각자의 영지에 틀어박혀 있으면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미끼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 판단은 한층 더 기사들을 두렵게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기사들의 명예였던 왕은 그렇게 고립되어 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카멜롯을 뒤로하고서 1년 후. 이민족들과의 운명을 가르는 결전에서 아서 왕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기사들이 내일의 생(生)을 위해 싸웠지만, 그녀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전략을 세우고 결단해 왔으니까.

이미 멸망만을 기다리던 나라는 이렇게해서 한순간의 평화를 얻었다.

그 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건 조금 힘들다.

그녀는 섬의 비밀을 신뢰할 수 있는 비서관에게 밝히고 해결을 시도해 보았다. 비서관은 섬에서 신비가 사라진다면 그에 필적하는 기적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진언하여 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후세에 일화로 남는 원탁의 성배 탐색에 관한 이야기이다.

왕이 말하는 성배를 구하고자 수많은 기사들이 여정에 올랐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서 왕이 옥좌에 오르고서 10년째 되던 마지막 해. 란슬롯 경과 왕비 기네비어의 부정이 드러났다.

2.5. 기사들의 이야기 - 가웨인

 

왕의 힘을 의심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저 분이야말로 이상적인 기사의 화신! 몸소 전장으로 앞장서는 모습, 그 등을 따라갈 때마다 저는 브리튼의 밝은 미래를 확신했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 딱 한 번 왕의 승리를 의심하고, 왕의 등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싸움이 있습니다.

마룡 보티건. 그것이 브리튼을 파멸로 이끄려 했던 것의 정체였습니다.

보티건이 내뿜은 일격으로 병사들은 증발했고 제 성검 갈라틴은 빛을 빼앗겼습니다. 왕의 성검 엑스칼리버의 빛도 간신히 피운 화톳불 같았습니다.

전투는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룡은 포효로 먹구름을 불렀고 거대화했습니다. 병사들의 무기며 사체, 성채의 벽돌을 휩쓸며 나타난 용의 머리.

왕께서는 알고 계셨을 겁니다. 보티건은 브리튼 그 자체라는 것을.

 


 

"아서 왕! 적은 브리튼 섬 전체가 육신인 자입니다! 아무리 성검이라 해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퇴각을...!"

"조금만 더 힘을 빌려주십시오, 가웨인 경."

"왕이시여?!"

"나와 귀공이 함께하면 섬의 분노 하나 둘 쯤, 성검을 가진 자가 가라앉히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예!"

 

"왕이시여, 마룡의 손을 베었습니다!"

"역시 가웨인 경! 다른 쪽을 찢어버리면... 더이상 하늘로 도망 못 친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제 무기가...! 그건?!"

"...땅 끝에서 빛을 쏘아라."

"그 빛나는 창은?!"

"...그것은 하늘을 찢고 땅을 잇는 폭풍의 닻... 롱고미니아드(땅 끝에서 빛나는 창)!"

 

"...보티건."

"어리석은 놈들. 폭군을 물리치려 더 큰 재앙을 불러들일 줄이야... 나의 아우, 우서의 아이여. 너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이제 신비의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문명의 시대, 인간의 시대다. 너의 근본적인 힘은 인간과는 맞지 않는다. 네가 있는 한 브리튼에 미래는 없다."

"...!"

"저주하는 게 좋을 거다. 옛 브리튼은,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멸망했다."

 


 

왕이 노인에게서 창을 뽑아내자 노인은 성채를 흔들리게 할 정도의 웃음소리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종전을 고하는 왕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한층 더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자들은 누구나가 왕의 힘에 감복했을 겁니다. 그 정도로 그 전투는 거룩했습니다.

아직 나라는 황폐하지만 우리에게 아서 왕이 있는 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02. 별빛

 

보티건 토벌 후, 아서 왕은 파괴되었던 성채 도시 부흥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래도 브리튼의 미래는 어두웠으며, 민초들의 생활은 변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마음에 악의가 싹트고 있었다.

'아서 왕은 이 나라를 빛나게 할 왕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의 말만 따르면 풍족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었나' 라며.

 


 

"제가 비난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올해도 흉작이고 농작물은 타국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겠습니다. 또 란슬롯 경의 도움을 받게 되는군요."

"원래부터 이 섬은 척박했어. 비왕 보티건을 쓰러뜨리면 평화로워질 거라고 누구나가 믿고 있었지. 그런데 결과는 달라. 인간은 올바른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올바른 것은 싫어해. 아서 왕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상적인 왕인 이상, 그들은 아서 왕에게 의존하고 동시에 꺼리기 시작할테지. 너는 그런 걸 꾹 참아내거나 혹은 짓밟고 군림해야 해. 너에게 주어지는 건 불의와 이해받지 못하는 것 뿐이야. 하지만 그게 많으면 많을수록 민초들의 생활은 안정되지."

"제가 괴로운 만큼 나라는 윤택해진다고요?"

"응. 알고 있잖아? 너는 그걸 이해하고 선정의 검을 뽑은 거니까."

"네. 그 점에 있어서 저는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지켜봐주세요, 멀린. 당장은 힘들지만 반드시 이 섬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전설에 나오는 아발론에도 지지 않도록, 반드시."

마술사가 실수를 깨달은 것은 이 때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계속 왕으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 검을 들었다. 왕에 대한 존경 같은 건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왕 우서와 마술사의 과오.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그녀가 추구하는 것의 차이를 깨달으며, 마술사는 동시에 그녀를 경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통치를 계속하다보면 이 여자애도 후회할테지. 그때 손을 떼면 된다.'

그런 잘난 생각을 했던 자신의 추악함에 마술사는 부끄러워하며 지금부터라도 길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모색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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