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사들의 이야기 - 케이

 

그 녀석이 처음 집에 온 것은 5살 정도쯤이었다.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의 나이 말이다.

처음 보자마자 장래에 대단한 미인이 되겠다는 걸 알았지만, 아버지가 '형으로서 아우의 본보기가 되어라'라기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끝까지 숨길 수 있을 리 없을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우서 왕은 다음 왕을 인간이 아닌 자로 준비하려 했다. 인간과 용의 혼혈, 인간의 형태로 태어나는 용의 화신을.

우서 왕의 피와 용의 피, 그 두 개를 연결하기에 걸맞은 고귀한 여자의 피. 로맨스 한 조각조차 없는, 결과만을 남기기 위한 행위였다.

거기에 사랑이 있었냐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도 모르니까 너는 인간이 아니란 거다.

이렇게 해서 아르토... 아서 왕은 탄생했다. 마술 세계에서는 개념수태라 부르는 것 같다만. 인간에게 용의 능력을 부여한다던가.

어쨌든 정상적인 인간으로는 자라지 못하겠지. ...보통은 말이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거야말로 진실미가 없는 얘기지만, 그 녀석은 마을 소녀들하고 무엇 하나 다를 게 없었다. 단순한 마을 소녀 말이야, 마을 소녀.

아, 그래도 승부욕 강한 건 원래 그랬군. 그 녀석에게 승패의 기준이란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것이었다.

지쳐도 곧바로 다시 얼굴을 들고... 적극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그런 주제에 상처는 잘 받는다. 올곧은 성격 때문에 모든 일을 융통성 있게 넘길 수 없었던 거겠지.

그런 녀석이 10년간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란거다. 그야 이상적인 왕이 되겠지. 나는 방해만 될 뿐이었지만.

선정의 검을 뽑은 후의 일은 네가 더 잘 알겠지.

수행이 끝나고 선정의 검 칼리번을 다루게 되자 그 녀석은 겨우 왕이라 선언할 수 있었다.

11회에 달하는 색슨족과의 전쟁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비왕 보티건을 쓰러뜨리고 이 백아의 성, 카멜롯 성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10년. 숨 돌릴 틈도 없었지, 서로.

너는 왕의 보좌라 말하고 다니면서 여색에 빠지고, 나는 원탁의 임무를 뒤로하고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녔지.

아서 왕은 제후들을 한데 모아 색슨족과의 싸움을 잘 해쳐나갔다.

뭐어, 평화로운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선왕 우서의 야망대로 이상적인 왕이 탄생한 거다.

한편 내 걱정은 기우였다. 끝까지 그 녀석이 여자라는 것을 추궁하는 기사는 없었다. 결국 누구도 아서 왕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이상적인 왕이라며 칭송하면서도 그 이상이 만인을 구하지 못한다고 깨닫는 순간 책임을 모두 떠넘겼다.

그 결과가 이거다.

아서왕이 로마에서 돌아왔을 쯤에는 모드레드가 군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이런 바보같은 집안 싸움은 짜증난다. 적당한 이유를 대서 해산시켜버려야지.

마지막으로 아서왕에 대한 소감을 말해달라고?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하루의 대부분을 왕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 거기다 잠 잘 시간조차 말을 돌보거나 마을을 순찰하는 데 쓰고.

그 녀석의 인생에는 그 녀석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있지만 그걸 충분히 겪은 경험이 없다. 이런 소름 돋는 얘기가 또 있겠냐?

나는 거인의 머리도 말로 벨 수 있는 남자지만 그런 나조차도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직 아버지와 함께 살던 무렵, 너무나 소름이 돋아서 내가 내뱉은 적이 있다.

"야, 넌 언제 자는 거냐?"

"걱정 마세요, 형님. 동이 틀 무렵부터 해가 떠오를 때까지 확실하게 숙면을 취합니다."

녀석은 웃으면서 말했다.

'동이 틀 무렵부터 해가 떠오를 때까지'란다. 3시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며칠 후, 알고 싶지도 않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녀석은 꿈 속에서마저도 몽마인 너에게 왕이 될 교육을 주입받고 있었다고.

웃기는 얘기다. 결국 정말로 잠들지조차 못했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 이 나라의 끝을 앞두고 문득 생각한 거다.

바보 같군. 그렇게까지 해서 그 녀석은 결국 뭘 하고 싶었던 것인지.

01. 선정의 아침

 

"아, 가면 안 돼! ...고마워요, 당신이 깨워주었군요. 어제는 난산이어서 걱정했지만 총명한 여자아이네요. 분명 아버지인 에트처럼 훌륭한 군마가 될 거예요."

"네네. 여러분의 아침밥은 빨리 준비할게요. 그리고 에트, 당신은 브러쉬질을 원하는 거죠?"

 

"들어보세요, 에트. 어제 드디어 엑터에게 한 수 땄어요. 아니 실은, 아주 조금 한 발자국 밀어낸 정도지만... 가혹한 전장이었다면 그건 한 수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최근엔 괴로워하는 표정을 자주 보게 됐어요. 기사의 거울이라 불리는 엑터가 침울해 있는 건 걱정이에요."

"아, 죄송해요. 브러쉬질을 멈추고 있었군요."

"저번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어요. '엑터, 고민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식사량을 줄이는 것 말고는 뭐든 도와드릴게요. 역시 허리가 아프신가요?'라고 했더니, '음. 그건 당신의 기분탓입니다. 제 몸은 앞으로 10년은 건재할 겁니다. 하지만 아르토리아 공, 그 제안은 뭐든지라고 하기 어렵군요'라고... 동요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어요."

"그렇네요. 분명 또 케이 형이 문제를 일으킨 거겠죠. 자, 끝이에요. 오늘도 털결이 곱군요, 에트."

 

"늦었습니다, 엑터! 늦잠 자느라!"

"그렇게 활기찬 모습을 보니 늦잠 같지는 않습니다만... 좋습니다. 자, 검을 쥐십시오. 오늘 아침도 엄격하게 단련해보록 하죠."

 


 

5세기 브리튼 섬. 이 섬은 현재 동란 속에 있었다. 토지를 찾아 이민족인 색슨족이 바다를 건너왔던 것이다.

브리튼은 많은 부족과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던 섬나라이다. 부족 간의 언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침략자에 대항해 각 부족의 왕들은 서로 협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왕이 이 결속에 금을 냈다. 그의 이름은 비왕 보티건.

브리튼에서 태어나, 브리튼을 멸망시키기 위해 태어난 백룡의 화신이다.

가장 위대했던 왕 우서 팬드래건은 보티건과의 전투에서 패해 그 모습을 영원히 감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브리튼은 암흑시대로 접어든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위대한 마술사 멀린이 "이것도 예언대로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서 왕은 후계자를 선정했다. 이 인물이야말로 시대의 왕! 적룡의 화신! 새로운 왕이 나타날 때야말로 원탁의 기사들이 집결하여 백룡은 쓰러질 것이다! 왕은 건재하며, 그 증거는 차후 나타나리라."

그것이 10년 전의 이야기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서 왕의 후계자는 올해 15살이 된다.

 


 

"아르토리아, 케이가 놔두고 간 물건인 것 같습니다. 지금 쫓아가면 늦지 않을 터. 마을까지 나가서 전해주십시오."

"으음... 제 형이면서 기사가 창을 잊어버리고 가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기마전은 오랜만에 열리는 것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케이 형에게 이걸 가져다주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걸로 오늘 당신이 할 일은 끝입니다."

 

"멀린이다! 멀린이 왔어!"

"멀린이?"

"응! 어제 왔어."

"드디어 우서 왕의 후계자가 정해진대! 전국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구!" 

"바위에 꽂힌 성검을 뽑은 기사가 왕이 된대."

"누가 뽑는 걸까~"

"누가 왕이 되는 걸까~"

"그랬구나... 그 말대로 선정의 검이군요."

 

"케이 형."

"어어."

"저게 선정의 검..."

"성검이여, 나를 선택해주소서! 흡! ......나는 왕의 그릇이 아니란 말인가."

"저런 훌륭한 기사도 안 되는 건가."

"정말로 왕은 나타나는 걸까."

"누구도 뽑지 못하는 검이라고? 있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식일 뿐이다. 왕은 기사들의 경기로 정할거다."

"그건..."

"이미 결정된 얘기다. 이게 제일 나은 방안이라고."

"왕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말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의 증표보다 부하와 돈, 힘으로 판단하는 게 인간적이다. 이익을 목적으로 협력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누구도 모든 것을 구하는 신의 대행자라는 건 보고 싶지도 않고 되고 싶지도 않았다는 거지."

"케이 형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물론이다. 너도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라. 다른 기사들이 보면 또 여자처럼 가느다란 몸으로는 검도 제대로 못든다고 조롱할 게 뻔해. 알겠냐?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너는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시합으로 왕을 정한대!"

"보러 가자!"

"우리도 가볼까."

"멀린의 예언은 거짓말이었나봐."

"누구도 보고 싶지도... 되고 싶지도 않다......."

 


 

어째서 아르토리우스라는 이름의 남자로 위장해 살고있는 것인가.

어째서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검을 배우고, 나라를 배우고, 사람으로서 자신의 바람을 지워 온 것인가.

당연하다. 그 모든 것들은 오늘을 위해, 왕의 검을 뽑기 위해서, 그녀는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녀는 친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이상적인 왕이라는 목적에 의해 계획되어 태어난 것이 자신이라고 한다.

사실,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 우서 왕의 원망이나 소원 같은 것에 공감하지 못했다.

마술사의 가르침에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감동하는 일도 없었다.

이 15년간 그녀를 격려하고 키워주었던 것은 양부 엑터와 의붓형 케이와의 평범한 나날이었으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였다.

동경도 사랑도 아니다. 그저,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는 좋게 비쳐졌을 뿐.

마을의 일원이 되고 싶다거나 그 속에 섞이고 싶다는, 그런 바람은 품지 못했다.

때때로 그런 광경을 그린 적은 있어도 냉정히 덮어버렸다.

그래서는 전부 허사가 된다고 마음 속 한 편에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그녀는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현명했기에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자신을 꾸짖어 왔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태어나듯이, 용에게는 용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고마워, 케이 형. 하지만... 미안해."

"그 검을 손에 쥐기 전에 충분히 생각해보는 게 좋아."

"놀랐습니다. 꿈 밖에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멀린."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만두는 게 좋을거야. 그걸 손에 쥐면 마지막에 너는 인간이 아니게 돼. 그뿐만이 아냐. 손에 쥐면 모든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테지."

"...네."

"괜찮겠니?"

"...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건 분명,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아아, 검을 뽑고 말았군. 괴로운 길을 선택했구나. 하지만 기적에는 대상이 필요하지. 아서 왕이여, 그대는 가장 소중한 것을 맞바꾸게 될 것이다."

00. 화원에서

 
그곳은 형형색색의 꽃이 만개해 있는 완만한 평원이었다.
낮은 봄볕과 여름 냄새로 가득했고 밤은 가을 공기와 겨울의 밤하늘로 뒤덮였다.
땅에는 꽃들과 벌레, 숲에는 물과 초록빛과 짐승, 그리고 호숫가에는 아름다운 요정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땅이자 영원히 그 누구도 나갈 수 없는 머나먼 섬.
그 이름은 아발론.
별의 내해 속 지구의 영혼, 그것이 놓여있는 곳의 또다른 이름이다.
그 화원에 인간의 모습을 한 자가 있다. 검소하지만 최고급 섬유로 짠 로브를 두른 남자였다.
햇살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 기백 없이 먼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와 자세.
남자는 5세기의, 곧 멸망할 어느 민족의 섬을 뒤로하고 홀로 이 낙원으로 전이했다.
어떤 왕을 섬겼던 마술사였지만, 왕의 마지막 전투 직전에 극히 개인적인 여성 문제로 인해 낙원으로 도망친 비인간이다.
수많은 신화, 전승에 나오는 위대한 마술사들의 정점에 선 자.
최고위 마술사의 증거이자 세상을 통찰하는 눈을 가진 인간과 몽마의 혼혈.
그 이름은 꽃의 마술사 멀린이라 한다.
 
멀린은 터벅터벅 화원을 걸어간다. 이 낙원에 끝은 없으나 변화는 있는 듯하다.
섬의 끝부분에 다가가니 그곳은 현실의 브리튼과 비슷하게 척박한 땅으로 변해 있었다.
눈앞에는 거칠게 깎은 돌로 쌓아올린 문이 있었다. 그곳에는 단 한 마디가 새겨져 있었다.
'죄 없는 자만이 지나갈 수 있으리라.'
멀린은 어깨를 움츠리고 피하지 않은 채로 문을 통과했다.
그 순간 황야였던 언덕이 변한다.
지면에서 두꺼운 석벽이 솟아나 마술사를 가두었다. 멀린을 증오하는 누군가의 소행인 것 같다.
'죄 없는 자만이 지나갈 수 있으리라.'
그가 함정임을 알면서도 발을 들였던 것은 그 말이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모든 전말을 간파할 수 있는 멀린에게 있어 세상은 한 폭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멀린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림, 다시말해 인류의 행복한 결말을 바라지만 그곳에 인간에의, 하물며 개개인에 대한 사랑은 없다.
그러므로 행복한 번영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벌레 죽이듯이 소비해 왔다.
그곳에는 선악도 호불호도 없었다. 그래서 죄의식도 없었다.
'죄 없는 자'란 지상에서 자신만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멀린은 인간을 도와줄 뿐. 왕을 만들 뿐.
그로인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그에게 책임은 없고 죄책감도 없었다.
 
남자는 좁은 독방 안에서 딱 하나 툭 튀어나온 바위 구석에 걸터 앉았다.
시선을 위로 향하니 벽에는 딱 하나 작은 창이 열려 있었다.
같은 시대라면 남자는 어떤 장소에 있든 세상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다.
꽃의 마술사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품에 숨겨 두었던 사역마 캐스팔루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지막 광경은 이제 금방이야. 그 전에 잠깐만 옛 추억 이야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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