掌に刻まれている
테노히라니 키자마레테이루
손바닥에 새겨져있는
 
ツギハギのようなその線に触れて
츠기하기노 요-나 소노센니 후레테
누덕누덕한 그 선에 닿아서
 
ひび割れそうな頭と
히비와레소-나 아타마토
깨질 듯한 머리와
 
硝子が刺さった心で前へ 走る
가라스가 사삿타 코코로데 마에에 하시루
유리가 박힌 마음으로 앞을 향해 달려가
 
壊れかけの世界 崩れそうで目眩
코와레카케노 세카이 쿠즈레소-데 메마이
부서져가는 세계 무너질 것 같아서 어지러워
 
空っぽな体で 歪な視界
카랏포나 카라다데 이비츠나 시카이
텅 빈 몸과 일그러진 시야
 
ゾクリと脈を打つ 命の線
조쿠리토 먀쿠오우츠 이노치노센
오싹하게 맥박이 뛰는 생명의 선
 
ナイフでなぞって 伸ばしてしまえたら
나이후데 나좃테 노바시테 시마에타라
나이프로 따라긋고 이어버리면
 
ねぇ 誰か教えて 月が見えるなら
네- 다레카 오시에테 츠키가 미에루나라
누군가 알려줘 달이 보인다면
 
消さないで まだ消さないで
케사나이데 마다 케사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아직 지우지 말아줘
 
消えないで まだ消えないで
키에나이데 마다 키에나이데
사라지지 말아줘 아직 사라지지 말아줘
 
 
消さないで 消えないで
케사나이데 키에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사라지지 말아줘
 
消さないで 消えないで
케사나이데 키에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사라지지 말아줘
 
文学的で 退廃的で
분가쿠테키데 타이하이테키데
문학적이고 퇴폐적이고
 
現実的で 空想的で
겐지츠테키데 쿠-소-테키데
현실적이고 공상적이고
 
感情的で 感傷的で
칸죠-테키데 칸쇼-테키데
감정적이고 감상적이고
 
快楽的で 壊滅的で
카이라쿠테키데 카이메츠테키데
쾌락적이고 괴멸적이고
 
絶対的で 普遍的で
젯타이테키데 후헨테키데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不自然な「今」の見方を
후시젠나 이마노 미카타오
부자연스러운 「지금」의 관점을
 
壊れかけの世界 崩れそうで目眩
코와레카케노 세카이 쿠즈레소-데 메마이
부서져가는 세계 무너질 것 같아서 어지러워
 
空っぽな体で 歪な視界
카랏포나 카라다데 이비츠나 시카이
텅 빈 몸과 일그러진 시야
 
時には月を 月には愛を
토키니와 츠키오 츠키니와 아이오
시간에는 달을 달에는 사랑을
 
愛には罪を 罪には罰を
아이니와 츠미오 츠미니와 바츠오
사랑에는 죄를 죄에는 벌을
 
罰には人を 人には夢を
바츠니와 히토오 히토니와 유메오
벌에는 사람을 사람에는 꿈을
 
夢には貴方を 貴方には誓いを
유메니와 아나타오 아나타니와 치카이오
꿈에는 당신을 당신에게는 맹세를
 
ゾクリと脈を打つ 命の線
조쿠리토 먀쿠오우츠 이노치노센
오싹하게 맥박이 뛰는 생명의 선
 
ナイフでなぞって 伸ばしてしまえたら
나이후데 나좃테 노바시테 시마에타라
나이프로 따라그어 이어버린다면
 
ねぇ 誰か教えて 月が見えるなら
네- 다레카 오시에테 츠키가 미에루나라
누군가 알려줘 달이 보인다면
 
消さないで まだ消さないで
케사나이데 마다 케사나이데
지우지 말아줘 아직 지우지 말아줘
 
消えないで まだ消えないで
키에나이데 마다 키에나이데
사라지지 말아줘 아직 사라지지 말아줘

DAY-1 / 귀로의 아침Ⅰ

 

조금 전까지 지상에 깔려있던 노선은 예고도 없이 지하노선으로 바뀌었다.

전철은 인공의 빛을 흩뿌리면서 어둠 속을 헤엄치듯 나아간다.

 

삐걱거리는 차량 소리. 같은 간격으로 지나가는 인공등.

시트 너머로 전해져오는 진동을 초침 삼아 거리와 시간의 경과를 생각해본다.

 

아침, 오전 6시 33분.

이 전철에 탄 지 30분 정도 지났다.

이제는 돌아갈 일 없는, 오랫동안 신세를 진 사람들의 집을 나온 지 그 정도뿐인 시간과 거리가 지났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인간으로서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 정도뿐』이라며 멀지않은 거리라고 느끼는 것인가,

『이제 이걸로 끝』이라며 정리하게 되는 거리인 것인가.

 

자신은 어느 쪽일까 생각해본다.

고심한 끝에 그 어느 쪽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8인용 좌석에는 나 혼자만이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승객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인, 옆 열의 좌석에서 졸고있는 정장차림의 남성과 문 앞에 서있는 소녀 뿐이었다.

이른 아침의 전철이라는 것도 있어서 차량 내부는 꽤 조용했다.

 

생각에 잠긴 탓인지, 차량 밖의 구동음은 신기하게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막연히 어두운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선이 떠올랐다.

난잡한 외계의 소리는 닿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것은 쓸모없는 내 공상과, 혈액을 토해내는 심장소리와, 불과 한 시간 전에 지나갔던 추억 뿐.

 

그것은 우연한 이야기였다.

"토오노 마키히사가 죽었다. 그 집에 맡겨두었던 토오노 시키는 본가로 돌아오도록."

7년 가까이 소식이 없던 본가에서의 연락은, 그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토오노 본가의 결정에는 거스르지 않는다. 나는 아직 학생이며 양육비를 받고있는 신분이기도 하다.

저택으로 돌아갈 날을 전날 밤이 아니라 당일 아침으로 정한 것은 고집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았던 집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싶다―――

본가의 결정이라고는 해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나를 가족으로 맞아준 아리마 가(家)사람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의였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도 맛있었어요."

해가 뜨기 전에 아침밥을 다 먹고 식탁을 뒤로한 채 내 방 앞에서 손을 모았다.

 

오랜 세월에 대한 감사치고는 무미건조했지만, 마음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미련이 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밝은 일들 뿐이었다. 가져가는 짐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리마 가를 나올 때 배웅해준 것은 케이코 씨 혼자였다.

최대한 조용히 다른 가족을 깨우지 말아달라 부탁했던 것은 나였다.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버님과 미야코에게도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7년 간――내 친모 역을 맡았던 사람은, 무척이나 슬픈 눈이었다. 이 사람의 그런 얼굴을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토오노 저택에서의 생활은 힘들겠지만 힘 내. 넌 몸이 약하니까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

걱정이 담긴 말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 7년 동안은 정말이지 평온했다. 아리마 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내가 있던 시간이 고통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 정도로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7년이나 지나면 대부분 다시 건강해져요. 이래보여도 은근히 튼튼하다고요, 제 몸은."

"맞아, 그랬지. 토오노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 뿐이지만, 특히 너는 겁이 없었지. 어릴 때부터 줄곧 우리가 놀랄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아이였어."

 

쓴웃음 섞인 말에 나도 똑같이 웃음이 지어졌다.

케이코 씨 안에서는 아직 내가 "우리 애"인 것이 기뻤다.

 

"그건 과대평가예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도 건강하세요."

"그래. 너도 건강하렴, 시키."

다녀오렴, 이라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 케이코 씨 다웠다.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것이 불과 40분 전의 일.

내가 새로운 생활을 맞이할 시점이며,

토오노 시키라는 인간의 지금까지의 인생이었다.

 

밖의 경치가 조금씩 바뀌어간다.

강 건너편 교외인 야시로기를 지나 도시인 소우야로 들어온 것일 터.

 

선로는 다시 지상을 향해간다. 완만하게 경사를 올라가는 감각.

인공 불빛에 익숙해진 눈을 일깨우듯이 햇살이 비쳐들었다.

 

도시를 바라보며 전철은 달린다.

마을은 아직 대부분이 눈을 뜨지 않았다.

밖은 냉기를 품은 대기가 가득했다.

여름의 모습이 사라진 10월의 가을 아침 그 자체였다.

 

생각해보니 이 풍경을 1년하고도 반 년을 바라봐왔다.

전철에서의 등교풍경도 이걸로 끝이다.

지나쳐가는 풍경에 겹쳐보듯이, 이 7년 간을 되돌아본다.

 

10살 무렵――보통이라면 즉사였을 중상에서 회복하고,

선생을 만나고,

아리마 가에서 살게 되고,

이렇게, 고등학교 2번째의 가을을 맞이했다.

 

그때――헤어질 때 선생님이 말했던 특별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기도 했고, 선생님이 주신 안경을 쓰고 있는 한 『선』을 볼 일은 없었다.

토오노 시키는 평범하지만, 좀처럼 얻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부터는 그것이 좀 더 소중해지게 되었다.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분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이다.

본가...... 토오노 가의 가풍은 일반가정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귀찮...... 너무 무거운 감이 있다.

 

「......애초에 학교보다 넓은 서양식 저택이라니 상상도 안 가는데...」

어린 시절엔 '잘도 견뎠구나' 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생활로 돌아갈까보냐' 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고민은 안 되어도 주눅이 들게 되는 것이다.

 

전철은 큰 역에 도착해 몇 분 간 정차했다.

완행이어서 옆 급행열차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홈에 사람 그림자는 없었다.

이 시간이면 정장차림의 샐러리맨이 몇 명인가 있을 법했지만 오늘 아침은 특히나 조용했다.

 

옆 선로를 급행열차가 지나간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음 정거장은――

익숙한 안내음. 공석으로 닫히는 자동문.

학교가 있는 소우야 역까지 앞으로 네 정거장인 것을 확인하고,

 

「으아아, 잠깐 잠깐!」

 

「하아~ 위험했다 위험했어,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어」

 

자동문 틈새로 미끄러지듯 나타난 것은 우리 고등학교 여학생이었다.

초록색 리본이므로 3학년이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손에 든 가방은 부 활동 도구일까.

 

――――

문득 시선이 겹쳤다.

상급생인 여학생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터벅터벅 가까이 오나 싶더니,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아,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흘깃흘깃 쳐다봐서

상대방의 미소에 따라 무심코 사과하게 되었다.

 

「아뇨 아뇨, 눈에 띄는 행동을 한 제가 잘못한 거예요. 선배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그나저나 아침에 약하다던 얘기, 정말이었네요

 

쿡쿡 웃는 상급생.

그 행동에 멍해있자,

 

「저기. 저예요, 저라구요. 저번주에 봤으면서 벌써 잊어버린 건가요?

 

「어라...... 시엘 선배...?

일순간 기억이 흔들렸다.

분명 본 기억이 있다. 이 사람과는 학교에서 몇 번인가 만났다.

애초에 우리학교 학생인 시엘 선배를 모르는 녀석은 없을 것이다.

 

누가 불렀는가, 소우야 고등학교의 만능 선배를.

1학년에 고민하는 학생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상담해주며,

2학년에 방황하는 학생이 있으면 문제 그 자체를 해결하며,

3학년에 곤란한 학생이 있으면 후배 괴롭히기를 멈춰준다.

 

교사들과 학생회보다도 믿음직하기 때문에 진정한 학생회장이라 부르는 학생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분명 나도 저번주에 사소한 일에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멍하니 있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선배의 말대로 아침에 약한 것과 7년만에 본가로 돌아가는 걸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나는,


1. 아쉽지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2. 살짝 의문이 생겼다.

3. 모처럼이니 차분하게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말문이 막힌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선배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였다.

 

「어... 선배는 전철로 통학하시나요?

「그렇네요. 때에 따라 이용해요. 토오노 군은? 집이 먼가요?

「멀어요, 기점에서 오거든요. 그래도 이제 그것도 끝이네요. 전철로 통학하는 건 오늘로 끝이라

「오호. 집이 이사를 한다거나?

「........

 

그럴듯한 설명이 잘 떠오르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것으로 "사정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주었는지, 시엘 선배는 더 묻지 않았다.

 

15분의 시간 동안 적당한 대화를 계속했다.

전철은 금방 목적지인 소우야 역에 도착했다.

DAY-0 / 유리로 된 달 - 프롤로그

 

다음 날.

만난 지 7일째의 들판에서 선생님은 커다란 트렁크를 한 손에 들고왔다.

 

「자. 이걸 쓰고 있으면 이제 이상한 낙서는 보이지 않을거야」

 

선생님이 내민 것은, 평범해 보이는 안경이었다.

 

「저, 눈은 안 나빠요」

「상관없으니까 써. 도수는 없으니까」

 

선생님은 강제로 안경을 나에게 씌웠다.

그러자―――

 

「우와! 굉장해, 굉장해요, 선생님! 낙서가 하나도 안 보여요!」

「당연하지. 일부러 언니네 사무소의 마안살을 빼앗아가며 만든 아오자키 아오코 혼신의 작품이니까. 함부로 다루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시키」

 

「응, 소중하게 다룰게요! 그런데 역시 선생님은 대단해! 그렇게나 싫었던 선이 모두 사라지다니, 왠지 마법 같아요, 이거!」

「그야 당연하지. 왜냐면 나, 마법사인걸」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선생님은 트렁크를 지면에 놓았다.

 

「하지만 시키. 그 선은 사라진 게 아냐. 단지 보이지 않게 한 것 뿐. 그 안경을 벗으면, 선은 다시 보일거야」

「보이지 않을 뿐?」

 

「응. 그것만은 치료할 수 없는 부분이야. 너는 그 눈과 어떻게든 타협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싫어. 이런 무서운 눈, 필요없어요. 또 선을 잘라버리면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잖아요」

 

「아아, 이제 두 번 다시 선을 자르지 않겠다고 했던 그거 말이지. 바보구나, 그런 약속 따윈 가볍게 깨뜨려도 돼」

「......그래요? 하지만 절대 하면 안 될 짓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해선 안 되는 짓이야. 하지만 그 눈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너만의 힘인걸. 그러니까 그걸 사용하는 건 너의 자유. 그 눈이 존재하는 것에 관해선, 너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너를 비난할 수 없어.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네가 그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 뿐이야, 시키」

 

「내가―――무엇을 하는가―――」

 

선생님은 내 눈을 들여다보듯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야. ......응, 역시 좋은 눈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귀찮은 일을 마주했네 싶었어. 왜냐면 너, 많은 걸 잃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문제 따윈 없었어. 너는 확실하게 살아있어. 그렇다면 인생을 걸고 만회하렴」

 

「―――――」

―――이 때의 가슴 속 빛을, 눈가까지 벅차오른 기쁨을, 나는 평생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너는 여기 있어도 돼"라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나를 긍정해주었다.

 

「시키. 너는 개인이 보유하는 능력 중에서도 엄청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말았어.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존재한다는 건,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거야. 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힘을 나눠주지 않아. 네 미래에는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오기 때문에 그 직사의 마안이 있다고 할 수 있어. 그건 잔인한 일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마. 너는 무척이나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금의 네가 있는 한, 그 눈은 결코 틀린 결과를 낳지 않을거야」

 

「성인(聖人)이 되어라, 라고는 하지 않을게. 너는 네가 올바르다고 믿는 어른이 되면 돼. 하면 안 되는 일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너라면, 10년 후에는 분명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거야」

 

선생님은 일어나더니 트렁크에 손을 뻗었다.

「아, 그래도 웬만하면 안경을 벗으면 안 돼. 특별한 힘은 특별한 힘을 부르는 법이니까. 자, 내가 건네는 충고, 그 두번째. 반칙을 쓸 타이밍과 승부를 걸 타이밍을 잘 생각하라.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만, 도저히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 안경을 벗고 잘 생각한 뒤에 힘을 행사하렴」

 

「그 힘 자체는 결코 나쁜 게 아니야. 결과를 좋게 만들지 나쁘게 만들지는 어디까지나 네 판단에 달렸으니까」

 

트렁크를 들어올린다.

――선생님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작별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무리예요, 선생님. 저 혼자서는 좋은 일로 만들 수 없어요. 실은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있어서, 저는 저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안 돼요. 선생님이 없으면 이런 안경이 있어도 안 될 게 뻔하잖아요......!」

 

「시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 것. 자기자신도 속일 수 없는 거짓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

 

선생님은 언짢은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이젠 괜찮다는 걸. 그렇다면 그런 시시한 말을 하면서 어렵게 되찾은 자신을 버려서는 안 돼」

 

「그럼 이제 작별이야. 바이, 시키. 어떤 인간이든 인생이란 함정 투성이야. 넌 그걸 헤쳐나갈 힘이 있으니까, 굳게 마음 먹으렴」

 

선생님은 가버린다.

너무나 슬펐지만 나는 선생님의 친구니까, 굳게 마음 먹고 배웅하기로 했다.

 

「――응. 안녕, 선생님」

 

「좋아, 잘했어 잘했어. 그 마음으로 항상 건강해야 해. 마지막 교훈. 위기일 때는 우선 침착한 뒤에 잘 생각해볼 것. 괜찮아. 너라면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테니까」

선생님은 기쁜 듯이 웃었다.

 

사아, 바람이 불었다. 풀숲이 일제히 흔들린다.

선생님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바이바이, 선생님」

그리 말하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겠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남은 것은 수많은 말과 이 신기한 안경 뿐.

단 7일 간의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배웠다.

 

멍하니 서 있었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얼마나 바보인가.

나는 작별인사만 했을 뿐.

고맙다는 한 마디를, 그 사람에게 전하지 못했다.

 

내 퇴원은 그로부터 금방 후였다.

퇴원한 후, 나는 토오노 가(家)에서가 아닌 다른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몸은 회복했지만 후유증이 남게 된 나는 토오노 가에 있어 불필요한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토오노 시키는 혼자서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새로운 생활을, 새로운 가족과 보낸다.

10살의 여름을 보낸 병실을 뒤로 한다.

 

커튼은 변함없이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다.

너무나 푸르른 하늘에 딱 한 번 눈을 가늘게 뜬다.

건조한 바람이, 여름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DAY-0 / 유리로 된 달 - 프롤로그

 

깨닫고보니 병원 침대에 있었다.

 

커튼이 펄럭펄럭 흔들리고 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쌀쌀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제멋대로인 색깔에 무심코 눈을 가늘게 뜨고 만다.

 

이곳이 어디인가, 지금이 언제인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머리가 쫓아가지 못한다.

 

일어나려고 손에 힘을 주자 손보다 먼저 몸이 움찔거렸다.

숨을 멈추고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뻐끔 거린다.

 

이런 것을 '눈에서 불꽃이 튄다'라고 말하는 거겠지.

딱딱한 침대에 손을 올린 순간, 찢기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

 

「―――、―――」

깊게 숨을 들이쉬고, 누운 채로 자신의 몸을 관찰한다.

 

양손은 둘둘 붕대가. 왼발도 하얀 깁스가 둘러져있다.

이마 주변이 매우 갑갑했기에, 분명 머리에도 붕대가 감겨있을 것이다.

가슴에는 보기 싫은 것을 감추듯, 커다랗고 두꺼운 반창고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왼팔에는 튜브가 하나 꽂혀있다.

그것이 정맥주사인 것을, 나는 왠지 모르게 깨달았다.

 

이렇게 잠에서 깨기 전에 비몽사몽하게 주변을 보았던 덕분이겠지.

 

이곳보다 어둡고 약품 냄새가 나던 방도, 가슴의 반창고에서 늘어뜨린 몇 개인가의 튜브도,

병문안 왔던 무서운 양복차림의 어른도, 그 어른에게 혼나면서도 와주었던 동생의 모습도,

아이처럼 떠드는 박사님의 모습도,

전부, 마치 꿈을 꿨던 것처럼 기억한다.

 

「어? 너, 눈을 떴구나......!?」

익숙하지 않은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는 대답할 체력도 없었다.

 

여자애는 허둥대면서도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방 밖으로 달려갔다.

탁탁탁탁.

서두르는 건 알겠지만, 병원에선 뛰면 안 돼.

 

「―――――」

몸은 일으킬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창문을 올려다본다.

찌릿하고 안구가 쪼개지는 것 같다.

머릿속을 날붙이로 휘젓는 느낌.

 

정말――거짓말처럼 푸른 하늘.

새하얀 햇살보다도, 얼룩 한 점 없는 푸른색이 너무 잔혹해서 눈이 아팠다.

 

그로부터 며칠후.

눈을 뜨고나서 한동안 나는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올려다본 창밖은 변함없이 드높은 하늘. 펄럭펄럭 흔들리는 커튼.

뺨에 닿는 건조한 바람. 얼룩 하나 없는 푸른색은 눈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어째서 병원에 있는 것인지는, 조금씩이지만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약속을,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어버린 느낌이 들어 창밖을 계속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토오노 시키 군. 회복 축하해.」

처음 보는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구해왔다.

 

웃는 얼굴은 무척 상냥했고 말투도 온화한, 잘 만든 어른의 인상.

분명 스위치 하나로 미소와 정색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깔끔해 보이는 새하얀 옷도, 이 아저씨에게는 딱 맞았다.

 

「시키 군? 선생님이 하는 말, 알아듣겠니?」

「......아뇨. 전 왜 병원에 있는 건가요」

「기억 못하는구나. 넌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에 휩쓸렸단다. 가슴에 유리파편이 박혀서 말이지, 어떻게해도 살릴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어」

 

하얀 아저씨는 방긋방긋 웃는 모습으로 왠지, 의사 선생님답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어떻게해도 살릴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그 표현에, 참고있던 구역질이 올라왔다.

 

「......졸려요. 자도 되나요」

「그래, 그러렴.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 해」

 

의사 선생님은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정말 못 봐주겠다.

 

「선생님,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니, 시키 군」

 

「왜 몸 전체에 낙서를 칠한 건가요. 이 방도 군데군데 금 투성이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은 아주 잠깐 동안 웃는 얼굴을 무너뜨렸지만, 금방 방긋방긋한 얼굴로 돌아와 의자에서 일어섰다.

터벅터벅 바닥을 울리며 커튼 너머로 사라지고,

 

「.......역시 뇌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뇌외과의 아시야 선생에게 연락해. 그리고 시신경 손상이 의심되는군. 오후는 안과로 가서 검사를 하도록」

의사 선생님은 다른 사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몰래 간호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상해. 다들 몸에 낙서를 칠했어」

 

엉망진창으로 칠해진 선이 병원 전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보고있는 것만으로 엄청 기분이 안 좋다.

 

「...뭘까, 이거」

침대에도 낙서가 있다.

손가락을 갖다대었더니 손끝이 움푹 들어갔다.

 

――아

좀 더 가느다란 물건이면 깊이 들어갈 것 같았다.

선반에 있던 플라스틱 나이프로 낙서를 따라 그었다.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나이프는 끝까지 낙서 속으로 들어갔다.

 

재미있었기에 그대로 낙서를 따라 침대에 나이프를 미끄러뜨렸다.

우당탕.

무거운 소리를 내며 침대는 깔끔하게 갈라져버렸다.

 

「꺄아아아아!

 

뒤에서 울린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문 앞에는 굳은 얼굴로 간호사 선생님이 서 있었다.

 

「어떻게 침대를 부순거니, 시키 군

의사 선생님은 침대를 부순 이유가 아닌, 그 방법을 집요하게 물었다.

 

「저 선을 따라 그었더니 잘렸어요. 대체 왜 이 병원은 금 투성이인 거예요?

 

「적당히 하지 않겠니, 시키 군. 그런 선 같은 건 없어. 그래서 어떻게 침대를 부순거니. 혼내지 않을 테니까 알려줄래?

 

――그러니까, 선을 따라 그었을 뿐이라니까요

......알겠어. 이 얘기는 내일 또 하자

 

한숨을 쉬는 의사 선생님.

낙서 얘기를 하고나서부터 그 상냥한 웃음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분명 스위치가 고장난 것이겠지.

이 병원은 부서지기 쉬운 것들 뿐이니까.

 

결국, 누구 하나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 낙서를 나이프로 자르면, 그것이 무엇이든 깨끗하게 잘린다.

힘 따위 필요없다. 종이를 가위로 자를 때처럼 간단히 자를 수 있었다.

 

침대도. 의자도. 책상도. 벽도. 바닥도.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분명, 사람도.

 

낙서는 모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에게만 보이는 선.

 

저것은 분명, 누더기 같은 것이다.

상처를 꿰멘 자국.

내 가슴처럼 수술을 해도 아직 낫지 않은, 만지기 해도 너덜너덜 흩어지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렇지라도 않으면 어린애의 힘으로 벽을 자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

또 간호사 선생님이 외쳤다.

올록볼록하게 잘린 벽을 보고 나를 노려본다.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울려퍼진다.

내 귀는 이상해져서 별로 시끄럽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그치지 않는 소리는 불이 붙은 매미 같아서 불안해졌다.

 

모든 것이 너덜너덜했다.

눈을 뜨고있는 것만으로, 살아있는 것만으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아아,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세상은 이렇게나 누더기 투성이에,

무척이나 부서지기 쉬운 곳이었다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것이겠지.

이 이상한 세계를 눈치채지도 못한다. 이 상처투성이인 일상을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보인다.

두렵고 무서워서 걸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면 그 후로 귀는 얼어붙은 채로, 소리는 나는데도 무척이나 조용했다.

가슴의 상처만이 사이렌처럼 울렸다.

그런데 『그 후』는 『언제』인 걸까.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박박 머리를 긁어봐도 꺼내어지지 않았다. 분명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서 버려버린 게 틀림없다. 잠궈도 잠궈도 물이 흘러나오는 수도꼭지 같이.

 

......아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전부 설명이 된다. 거울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야 있었다면 제일 먼저 ■였을 것이다.

분명 웃으면서 머리를 쪼갰을 것이다. 즉, 부서질 것 같은 건 주변이 아니라, 고장난 건 나였을 뿐인 이야기라는 것 같다.

 

그래서이겠지.

그 후로 2주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 후로 2주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 후로 2주나 지났는데도, 나는 홀로 누더기 투성이인 세상에 살고있다―――

 

병실에는 있고싶지 않다. 낙서 투성이인 곳에 있고싶지 않다.

이곳에서 도망쳐서 아무도 없는, 먼 곳에 가기로 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이상한 거라고,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뛰쳐나갔다.

 

하지만 가슴의 상처가 아파서 조금밖에 달리지 못했다.

깨닫고보니. 그곳은 병원 옆에 있던 들판으로, 조금도 먼 장소엔 가지 못했다.

 

「......커헉」

가슴이 아파서, 무척 슬퍼서, 지면에 웅크려 캑캑거렸다.

 

어디에도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된다.

누더기가 보이는 인간은 분명 어디에도 있어선 안 된다.

 

콜록, 콜록. 아무도 없다.

여름의 끝자락, 풀숲 투성이의 바닷속.

이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직전에.

「너. 이런 곳에서 웅크려있으면 위험해」

분명하게 귀에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어.........?」

「어, 가 아니지. 안 그래도 작으니까 풀숲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안 보이잖아. 조심해, 하마터면 걷어차일 뻔했으니까」

 

여자는 언짢은 듯이 나를 가리켰다

.......왠지 조금 화가 났다.

나는 반에서도 앞에서 네번째니까, 그렇게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걷어차인다니, 누구한테?」

「바보구나, 당연하잖아. 여기 있는 건 나랑 너 뿐이니까, 나 말고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야?」

여자는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했다.

 

「뭐, 여기서 만난 게 인연 같기도 하니, 조금 말상대가 되어줄래? 나는 아오자키 아오코라고 하는데, 너는?」

 

친구 같은 가벼움으로 여자는 손을 내밀어왔다.

거절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토오노 시키라 이름을 대고 휩쓸리듯 손바닥을 마주잡았다.

 

여자와의 수다는 무척 재밌었다.

이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어린애니까』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제대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 말을 들어주었다.

 

여러 일들을 얘기했다.

우리집에 대한 것. 역사가 있는 오래된 가문으로, 예의범절에 까다롭고, 아버지가 엄격한 사람이라는 것.

 

아키하라는 여동생이 있고, 무척 어른스럽고, 항상 내 뒤를 따라오던 것.

 

넓은 저택이었기에 숲처럼 넓은 마당에서 항상 아키하와 함께 친구들과 놀았던 것.

 

다락방이 비밀 아지트였던 것. 끝말잇기를 잘 못하게 된 것. 키는 아직 앞으로도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좋아했던 병원 냄새가 어느새 싫어지게 된 것.

구름이 없는 푸른하늘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도, 보고 있으면 울고싶어지게 되는 것.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은 멋진 일이고, 그 억지 웃음이 서툰 의사 선생님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말로.

나는 열에 들뜬 것처럼 여러 일들을 얘기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미안해, 시키. 나 볼 일이 좀 있어서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여자는 떠나간다.

......'또 혼자가 되는 건가'하고 생각하자 외로워졌다.

 

「그럼 또 내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너도 병실로 돌아가서 의사가 하는 말 잘 지켜야 해」

 

「아――

여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떠나갔다.

 

「......또, 내일

또 내일, 오늘처럼 이야기 할 수 있다.

기쁘다. 사고 후 눈을 뜨고 처음으로 사람다운 감정이 돌아왔다.

 

오후가 되면 들판에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여자는 아오코라고 부르면 화를 냈다. 자신의 이름이 싫다고 했다.

고민한 끝에, 왠지 모르게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서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내 고민을 한 마디로 해결해주었다.

 

사고 후,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워진 나는 선생님 덕분에 조금씩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들판에 있을 때만큼은 원래의 나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은 정말로 어딘가의 학교 선생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선생님과 있으면 즐겁다. 중요한 것은 그런 단순한 것이었다.

 

「있지, 선생님. 저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살짝 놀래키고 싶어서 병원에서 가져온 나이프를 사용해 들판에 있는 나무를 잘랐다.

 

저 낙서 같은 선을 따라그어서 종이를 찢듯이 한가운데에서 절반을 잘라냈다.

 

「굉장하죠? 낙서가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단하게 자를 수 있어요. 이런 거, 다른 사람들은 못하잖아요

 

――――

선생님은 놀랐다.

나는 신이 나서 이번에는 나무 뿌리에 일직선으로 나있는 선을 따라 나이프를 밀어넣어,

 

「시키―!

달려온 선생님의 손에 찰싹 뺨을 맞았다.

 

「선......생님?

「그만둬. 넌 방금, 무척 경솔한 짓을 했어

 

선생님은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차없는 눈. 나쁜 사람을 벌하는 흔들림 없는 눈.

 

아아, 어쩜 이리도 바보 같을까.

너무나 이 시간이 즐거워서, 나는 스스로를 잊고 있었다.

 

이 낙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나는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가슴에 번지는 피같은 후회. 자신의 어리석음에 죽고싶었다.

저 나무는 단 한 그루만 남은, 이 들판이 숲이었을 무렵의 기록이었는데.

나는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그것을 의미 없이 망쳐버린 것이다.

 

「......죄송해요

깨닫고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건 비겁하고 남자답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후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시키

사뿐히 내려앉는 감각.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이프를 쥔 나를 끌어안았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응 뭐어, 확실히 시키는 혼날 짓을 했지만 그건 결코 너만이 잘못돼서가 아니야

「......? 잘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야......?

「맞아. 그래도 말이야, 시키. 그것보다도 지금 누군가가 너를 혼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될거야. 그래서 나는 너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봤어. 같은 인간으로서 타이르고, 화내고, 진심으로 때렸어. 힘 조절을 잘못했다면 내가 시키를 죽였을지도 모를 정도로, 진심으로

 

그 말은 정말로 무서웠다.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만약"이 아닌, 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게 만든 것이 무척이나 슬펐던 것이다.

 

「울지마, 시키. 나도 사과하지 않을거야. 네가 그 정도의 일을 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으니까. ......응. 그 대신, 시키는 나를 싫어해도 괜찮아

 

「......아니. 선생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래. 정말로, 다행이다. ......내가 너를 만난 건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선생님은 조용히 내 후회를 녹여주듯이 내가 보던 낙서에 관해 물었다.

선이 보이는 것을 얘기하자, 선생님은 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키, 네가 바라보는 건 현실이야. 결코 보여선 안 되는 것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그 선은 환상이 아닌, 너에게만 보이는 또다른 현실」

 

「......그렇구나. 그럼 역시 이상한 건 나 혼자구나

「그래, 넌 이상해. 그건 틀림없어

 

울컥하는 스스로를 참는다.

의사 선생님이 믿어주지 않았을 때보다 몇 배나 더 아파서 꺾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알고있던 일이다.

처음부터―자신이 있어서는 안 되는 아이라는 것은 눈이 떠졌을 때부터, 줄곧 줄곧 알고있었다.

 

「조급해하지 마. 그 비정상은 이상할 뿐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게 아냐. 도리가 통한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향할 수 있다― 이거, 내 경험이야. 아무리 바보같이 터무니없는 일이 찾아와도 지혜와 용기로 극복하는 게 우리 인간이야

 

교훈 그 첫 번째, 라고 부끄러운 듯이 선생님은 말했다.

이상하더라도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인 것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 것인가 라고.

 

「그러면 이 낙서도, 설명할 수 있어요......?

「물론이지. 사물에는 말야, 망가지기 쉬운 부분이 있어

 

「언젠가 망가질 우리들은, 망가지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아. 너의 눈은 그런 사물의 말로...... 다시 말하자면 미래를 보게 되어버리는 거야

「......미래를......본다고요?

 

「그래. 지금은 그 이상은 몰라도 돼. 만약 네가 그 흐름에 휩쓸리게 되는 때가 온다면, 필연적으로 나름의 이치를 알게 될거야

 

「......선생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맞아, 알면 안 돼. 지금 중요한 건 한 가지. 그 선은 절대 장난으로 잘라선 안 돼. ―너의 눈은, 사물의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만들어버리니까

 

「응. 선생님이 그렇다면 안 할게요. 그리고 왠지 가슴이 아파요. ......죄송해요, 선생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않을게요

 

「......다행이다. 시키, 지금 이 감정을 절대로 잊지 마. 그렇게 한다면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거야

 

끌어안고 있던 팔이 풀렸다. 차갑지만 따뜻했던 감촉이 멀어져간다.

 

「하지만 선생님. 이 낙서가 보이면 불안해요. 이 선을 그으면 끊어지잖아요? 그럼 제 주변은 항상 산산조각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할게. 아무래도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인 것 같으니까

 

선생님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태양처럼 방긋 미소지었다.

 

「시키. 내일 너에게 특별한 선물을 줄게. 내가 너를 예전의 삶으로 되돌려줄게

DAY-0 / 유리로 된 달 - 프롤로그

 

 

 

문득, 눈이 떠졌다.

 

모두가 잠든 무렵, 밤의 냉기에 눈꺼풀을 뜬다.

어두운 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익숙한 다다미와 장지문 냄새.

촘촘히 세공한 것 같은 하늘.

방구석에는 찐득하게 달라붙은 오래된 그림자.

그것은 음표 하나 없는 정적이며,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상실 중.

 

꼼짝 않고 선 채로, 멍하니 사람을 기다린다.

절멸한 소리 속에서 과거를 그린다.

꾸었던 꿈은, 만약의 이야기들 뿐이었다.

예를 들면,

 

만약, 하늘이 흐렸더라면.

만약, 깨닫는 것이 조금 빨랐더라면.

만약, 그가 쇠약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약――여기서, 당신이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줄곧 기다려도 끝은 오지 않는다.

밤은 더욱더 깊어져간다.

분명 이제,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혼자서는 무서우니까 모두를 만나고 싶어서,

홀로 마당으로 나갔다.

 

호 하고 내뱉는 숨이 하얗게 번져간다.

마당은 무척이나 손끝이 아플 정도로 추웠다.

얼어가는 별.

깊은 어둠.

하염없이 세계를 비추는 차가운 빛.

 

무성한 풀. 짓밟는 감촉. 감감무소식인 신발 소리.

저택의 마당은 무척 넓어서

주변은 깊은 어둠에 갇혀서.

숲의 나무들은 검고 검은

커다란 커튼 같았다.

 

마치 어딘가의 극장 같다.

가슴의 고동으로, 목이 메일 것 같다.

스윽 나무 꼭대기의 창문이 열리고,

곧, 연극이 시작되는건가 두근거렸다.

 

귓가에, 시끌시끌 벌레소리가 기어들어온다.

멀리서 다양한 소리가 난다.

검은 나무들로 된 커튼 안쪽.

숲 안쪽에서 모두가 즐거운 듯이 떠든다.

막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무척, 어둡다.

숲은 깊어서 차가운 빛도 닿지 않는다.

다양한 소리가 나고

다양한 것이 있다.

그러나 어두워서 잘 모르겠다.

도중에 누군가와 스쳐지나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차갑다.

안구 깊숙히 저릴 정도로 차가운 겨울.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좀 더 깊이 걸어갔다.

 

나무들의 베일을 빠져나간 뒤.

숲의 광장에는 모두가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흐트러진 모습.

모두 뿔뿔이 흩어진 손발.

한편 새빨간 숲의 광장.

 

                    ―――모르겠다.

 

저편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온다.

흉기를 손에 들고 다가온다.

모두를 그렇게 한 것처럼 나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싶은 것처럼.

 

―――잘 모르겠다.

 

멍하니 그 사람을 본다.

하릴없이 흉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나의 앞에 달려와서

대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어린애니까 잘 모르겠다.

 

철퍽.

따뜻한 것이 얼굴에 묻는다.

붉다.

토마토처럼 붉은 물.

조각조각난 사람.

그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 후로,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정말로 잘 모르겠지만.

그저 추워서.

나는 울 것만 같았다.

 

숲은 어두워서 보고싶지 않다.

땅은 붉어서 보고싶지 않다.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기로 했다.

 

―――하늘을 가리는 천개(天蓋)

 

눈에 따뜻한 심홍색이 섞여든다.

안구 깊숙이 스며든다.

하지만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

밤하늘에는, 그저 달이 홀로 떠있다.

 

―――밤을 여는 새하얀 얼굴

 

모르는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나를 조각내러 다가온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도 나는 멍하니

언제까지나 짙푸른 그림자를 올려다본다.

 

―――우아하고도 아름답게 낙하하는 별

 

무척 신기하다.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아―――오늘밤은 이렇게나

 

깨닫고보니 모르는 사람은 눈앞에.

소리도 없이, 쿵, 고통이 느껴졌다.

그것은 가슴 한가운데.

휘날려 춤추는 베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가 점점 사라져간다.

그 속에서 계속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아아―――눈치채지 못했다.

 

오늘밤은 이렇게나

 

달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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