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기사들의 이야기 - 베디비어

 

싸움은 끝나고 피처럼 붉던 석양도 저물어, 지금은 밤의 어둠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시체로 가득한 언덕 위를 기사는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기사의 손에는 고삐가 쥐어져 있고 상처입은 백마가 열심히 그를 뒤따랐다.

살아남은 것은 기사와 그 백마. 그리고 백마의 등에 쓰러져있는 한 명의 왕 뿐이었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저 숲에 도착하면 반드시...!"

기사는 피에 젖지 않은 숲을 향했다. 그는 왕의 불사성(不死性)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깨끗한 곳에 있으면 왕의 상처가 아물지 않을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움직이는 자는 아니다. 그는 이 왕에게야말로 검을 맡기고 힘이 되겠다고 맹세했으며, 애송이이면서도 왕의 시중역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정을 숨기고 공평무사하려 하는 왕. 가까이 가면 왕의 본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된 것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인 사실뿐. 저 왕이 스스로를 위해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사는 언젠가 이 왕의 얼굴에 빛이 들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 고독한 그대로였다.

그래서 기사는 왕의 죽음을 계속 부정했다.

 


 

도착한 숲에서 기사는 왕의 몸을 큰 나무에 기대게 했다.

"왕이시여, 금방 병사를 부르겠습니다. 부디 그동안 견뎌주시기를."

"...베디비어."

"...왕이시여! 의식이 돌아오신 겁니까?"

"응... 조금, 꿈을 꾸었다."

"꿈... 말입니까?"

"그래. 별로 꾼 적이 없어서 말이지. 귀중한 체험을 했어."

"그건...? 그럼, 신경쓰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저는 그 사이에 병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무언가 무례한 말이라도...?"

"아니, 그대의 말투에 놀랐어. 꿈은 눈을 뜬 뒤에도 보이는 것인가? 다른 꿈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 같은 꿈이 나타나는..."

"...예. 간절히 바라면 같은 꿈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적은 없다. 꿈이란 원래 한 번 끊어지면 연속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사는 거짓을 말했다. 이것이 왕에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정임을 사죄하며.

"그렇군. 그대는 박식하구나, 베디비어. ...베디비어, 나의 명검을 들도록. 알겠나, 이 숲을 빠져나가 저 피로 물든 언덕을 올라가라. 그러면 깊은 호수가 보일 것이다. 그곳에 나의 검을 던져 넣어라."

"와...왕이시여?! 그 말씀은..."

"가라. 일을 마친다면 여기로 돌아와 그대가 본 것을 전해다오."

그리하여 기사는 산길을 지났지만 검을 던지기를 주저했다. 기사는 왕을 위해 아까워하여 검을 버리지 못한 채 호수에서 발길을 돌려 왕의 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왕은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검을 버렸다고 말하는 기사에게 왕은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었다.

이제는 왕의 의지를 바꿀 수 없다고 깨달은 기사는 3번째가 되어서야 검을 호수로 던졌다. 성검은 호수로 돌아갔다.

산길을 빠져나갈 무렵, 숲은 아침 햇살을 받아 흐릿해져 있었다. 청아한 빛 속에 전장은 사라졌으며 피투성이었던 전장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호수에 검을 던져 넣었습니다. 호수의 부인이 검을 들고 갔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가슴을 펴도 좋다. 그대는, 그대의 왕의 명예를 지킨 것이다. 미안하다, 베디비어. ...이번 잠은 조금 길어질..."

"...보고 계십니까, 아서 왕. 꿈의 계속을..."

어둡던 하늘이 드높고 청명해졌다. 싸움은 이걸로 정말 끝난 것이다.

중얼거린 말은 바람에 흩날리고, 잠이 든 왕은 끝없는 푸르름에 잠기듯이 먼... 머나먼 꿈을 꾸었다.

06. 화원에서

 

"그랬지! 난 갇혀 있었지. 으음, 뭐 이런 울퉁불퉁한 감옥이 다 있담. 이걸 만든 술자는 분명 세심한 작업은 못 할 것 같네."

남자는 어깨에 얹었던 지팡이를 손에 쥐더니 그 윗부분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 순간 담의 구조가 더욱 견고해지고, 설령 세계가 끝난다해도 무너지지 않을 첨탑이 되었다.

출입구로 보이는 것은 없다. 이 탑은 이제 외계와는 관련되지 않는 전망대가 된 것이다.

마술사는 여기서 홀로 끝까지 자신의 죄를 지켜보는 길을, 아무렇지 않게 그저 즉흥적인 마음으로 골랐다.

남자는 바위에 앉아 창문을 보고 있다. 멸망한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어떤 상태에 빠진 것인지 남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하고 말았다. 브리튼의, 아니, 잃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 결과가 저것이다. 왕은 캄란의 언덕에 머무르며 죽음의 연못에서 온갖 시대에 소환돼 끊임없이 성배를 원하고 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그녀는 살아있으면서도 영령인 것이다. 그리고 성배를 손에 넣으면 계약은 성립된다. 

그녀는 사후 수호자로서 끝임없이 싸우게 되겠지.

그거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일만큼은 용인할 수 없었다.

그 소녀가 성배에 무엇을 바랄지는 추리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 반드시 선정의 날을 다시 시작하려 할 터.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짓이다. 아르토리아라는 소녀의 지금까지의 싸움, 고통을 없애버리고 마는 계약.

그 소원만큼은 인간이 아닌 마술사도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그녀의 성능을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배를 손에 넣겠지.

성배를 가지게 되면 그녀는 소원을 이룰 것이다.

구원도 없는 미래를 기다리는 건 이렇게나 괴로운 일이었나.

정원에 시간은 없지만 지금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1초 1초가 견딜 수 없이 영원하다고 느껴진다.

1초 1초가 눈을 돌리고 싶은 찰나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05. 캄란의 날

 

"대승리야!"

"이걸로 전쟁은 끝났어!"

"돌아가면 당장 밭을 갈아야겠네!"

"그래, 가족들이 기다린다고."

"로마와 조약을 맺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은 오지 않겠지."

"...!"

"모드레드 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일곱 호족, 여덟 제후는 반역에 찬동, 카멜롯이 함락되었답니다...!"

그것이 그녀가 쌓은 공훈의 보답이었다. 

모르건의 자식이자 아서 왕의 복제품인 원치 않는 아이, 모드레드.

그, 아니, 그녀는 아서 왕의 부재 동안 반란분자를 모아 카멜롯을 점령하고 귀환 중인 왕의 군대를 괴멸시키고자 해안선에 포진해 있었다.

후세에 불리리라. 아서 왕의 마지막 전투, 기사도가 내버려진 황혼의 전장, 많은 빛들이 사라진 시체들의 산.

캄란 언덕의 전투라고.

 


 

로마 원정에 지친 왕의 군사를 모드레드의 군대가 진형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 왕과 그 측근들이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브리튼에 남아있던 가웨인과 케이의 조력 덕분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국토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 과정 동안 철수와 추격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반역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드레드의 반역에 찬동한 병사들은 누구도 아서 왕을 증오하여 단결한 것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란, 지력이 약해지는 토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그들은 계속 견뎌왔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매번 호소했다.

"내일 이기기 위한 조치다. 다들 견뎌줬으면 한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해왔다. 왕은 정말 이상적인 왕이었다.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청렴결백하게 살기를 모두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반드시 풍요로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그 인내는 언제가 되면 끝나는 것인가.

"모두들 이미 한계였구나... 나만 혼자 아무렇지 않았어..."

이상적인 왕은, 그러나 이상적이었기에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이때 꺾였다는 것을.

 

7일째 아침. 전투는 캄란의 언덕에 도달했다. 양쪽 군대의 격돌은 해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아군도 적군도 대부분 전멸하고 이제 생존해 있는 자는 꼽을 수 있을 정도인 시체들로 된 산. 피투성이가 된 캄란의 언덕에서 그녀는 어느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 말을 인정하면서 그녀는 꺾인 마음을 일으켜세워 창을 쥐었다.

성검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녀의 마음이 꺾였을 때 지상의 별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전장에 남은 기사는 둘. 왕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형의 갑주를 입은 자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검, 클라렌트를 땅에 끄는 모습은 망령 그 자체였다. 나라를 빼앗고 병사를 죽이고 형태 없는 것에 굶주린 망령은 말한다.

 


 

"이제 끝을 낼 때가 됐군, 아서 왕."

"모드레드인가."

"...길었어. 여기 도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전장 속을 헤맸어. 어때? 당신의 나라는 이걸로 끝났어. 끝나버리고 말았어. 내가 이기든 당신이 이기든, 이젠 모든 게 멸망해버렸어. 어째서 내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를 자식이라 인정하지 않았나! ...어째서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했나! ......왜 대답하지 않지!?"

아서의 성창이 반역자의 복부를 꿰뚫고 쓰러뜨렸다. 반역자의 마검은 왕의 투구를 깨드렸고 두개골을 갈라 그 한쪽 눈과 여명을 빼앗았다.

아서 왕, 아르토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더는 의미가 없는 성검에 의지하여 언덕이 된 기사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누구도 본 적 없을 맨 얼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누르며, 슬픔에 호흡이 막히면서, 그녀는 브리튼의 종말을 내려다보고, 통곡했다.

"나는 많은 싸움을 일으키고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니 나는 누구보다도 비참히 죽으리라고, 누군가에게 증오를 받아 죽으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고통 받는 건 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리석은 왕 혼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아니야.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이런 끝을... 나는 추구하지 않았어! 브리튼이 끝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더 평화로운... 잠들 수 있을 끝이라 믿었는데! ...이건 아냐. 결단코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은 용인되어도 이 광경은 용인할 수 없다!"

실의의 밑바닥에 있는 그녀는 그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

'기회를 주겠다. 그 바람의 성취와 맞바꿔 그 사후를 가지고 싶다.'라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모를리 없었는데도. 그래도 왕은 의지하고 말았다.

이 멸망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원한들 상관없다고.

아아, 악랄한 기적이 그녀의 마음을 구원한다. 왕은 브리튼의 멸망을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구원을 거절했다.

왕의 성배탐색은 이때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래영겁 구원받을 수 없는 루프에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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