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미틸의 곁에 피가로가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레녹스와 파우스트의 모습도 보인다.

 

피가로

담력시험 때문에 울려버렸을 때는 정말 당황했었지. 루틸은 무서울수록 좋아하는 아이였어서 정도를 잘 몰랐거든.

눈알을 열 개 붙인 얼굴 같은 것도 준비해뒀었지만 안 하길 잘했네.

 

레녹스

그것 말고도 천장에서 피의 비가 내리게 하려고 하셨죠.

 

루틸・미틸

엑, 그랬나요? 그런 거...

 

미틸

무서워!

 

루틸

재밌을 것 같아!

 

현자

아하하.

 

네로

의견이 멋지게 갈렸네.

 

히스클리프

아무리 그래도 피의 비는 자극이 강한 것 같은...

 

피가로

그때는 재밌게 해주려고 의욕이 좀 넘쳤어서.

 

파우스트

너무 의욕이 넘쳤잖아. 애를 기절하게 할 셈이냐.

 

피가로

다음부턴 자제했어. 모처럼의 숙박회인데 재밌어야지.

기억하니? 숙박회 때 다같이 만든 스튜.

 

미틸

당연히 기억해요! 형님이 좋아하는 걸 전부 다 냄비에 넣어버려서...

 

레녹스

채소와 함께 캔디가 들어가는 등 개성적인 맛이었지.

 

루틸

심지어 크게 썰어서 식재료가 안 익어서...

 

피가로

먹을 때 다들 입에서 딱딱하는 소리가 울렸었어.

 

남쪽의 마법사들이 입을 모아 웃었다.

그들다운, 평소와 같은 광경이었다. 따뜻하고 명랑하며 가슴이 벅찬다.

언제까지나 이런 시간이 계속되기를.

 

미틸

...저, 다시 예전처럼 다함께 숙박회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 번 더 화단에 꽃을 심고 싶어요.

그리운 추억으로만 두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피가로

...그렇네.

 

피가로의 눈꼬리가 상냥하게 휘었다.

 

피가로

고마워, 두사람 모두. 여길 소중한 장소라고 말해줘서.

진료소를 없애는 건 일단 보류할게. 먼저 파우스트가 말한 방법을 시험해보자.

 

미틸

...피가로 선생님!

 

루틸

정말인가요!?

 

피가로

단, 기한은 하루뿐이야. 그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그 기한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이곳을 매개체로 해서 이변을 막을거야.

...레노도 그거면 괜찮지?

 

레녹스

충분합니다.

 

루틸

다행이다... 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가로 선생님!

 

네로

잘됐네, 미틸.

 

미틸

네!

 

히스클리프

그런데 파우스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이란 게 어떤 건가요?

 

파우스트

과거에 산의 늪과 함께 지하 깊숙히 묻힌 마법사가 있다.

그곳에 남은 사념을 폭발하게 만드는 주물을 찾아 악의를 버리는 방법이다.

 

미틸

산의 늪과 마법사의 주물...?

 

루틸

그런 게 여기 묻혀있는 건가요?

 

레녹스

정확하게는 묻혀있는 건 이곳이 아니라 훨씬 먼 장소라고 해.

그 마법사의 주물이 저주를 불러와서 산의 늪과 함께 이변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 같아.

 

시노

성가신 이야기군. 누구야, 그 마법사를 묻은 놈이.

 

피가로

글쎄,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니까 말이야.

 

네로

뭐 어쨌든 땅을 파내서 주물을 찾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얘기네.

 

루틸

그런 거라면 열심히 땅을 파도록 하죠!

 

미틸

네! 저, 반드시 찾을게요...!

 

히스클리프

다같이 찾으면 분명 발견할거야.

 

현자

맞아요, 힘내죠!

 

시노

우리가 협력하는 거니까 말이지. 주물이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파내서 찾기만 할 뿐이라면 여유롭다.

 

파우스트

당연하지.

 

히스클리프

...후후.

 

레녹스

그렇네요.

 

시노뿐만 아니라 파우스트의 믿음직한 대답에 모두들 조금 어색해했다.

 


 

그러고 잠시 뒤 우리들은 산의 늪이 묻혀진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생각보다도 멀었고 이동하는 데에 대략 반나절이 지나고 말았다.

 


 

피가로

산의 늪이 묻혀있던 건 바로 이 밑이야.

 

도착한 것은 바위산 중턱쯤이었다. 초목은 적고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파우스트

이제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곧바로 시작하지.

 

레녹스

목표물은 꽤 깊은 위치에 있다고 해. 모두들 이 밑을 마법으로 파내줘.

 

루틸・미틸・히스클리프

네!

 

피가로

이 주변을 한참 파내다보면 지반이 약한 곳이 있을지도 몰라.

거기는 한꺼번에 파낼 수 있을거야.

레녹스라면 알아볼 수 있겠지. 찾으면 신호를 보내줘.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까 애들은 피신시키고.

 

레녹스・파우스트・네로

........

 

레녹스

알겠습니다.

 

그것은 피가로가 제안한 절차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어른들이 상의한 작전은 이렇다.

주물을 발견하기 위해 땅속 깊이 구멍을 파내기에는 피가로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피가로는 젊은 마법사들에게 강한 마력을 가진 것을 숨기고 있다. 들키지 않도록 마법을 사용해야만 한다.

숨어서 마법을 쓰면서 의심받지 않을 타이밍에 『지반이 약한 곳을 발견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신호로 아이들을 이동시켜, 그 틈에 피가로가 강한 마법을 사용할 예정이다. 

 

피가로

우리는 이쪽에서 작업하자. 파우스트, 레녹스, 네로.

부탁해도 될까?

 

레녹스

네.

 

파우스트

레녹스 안쪽에 서면 되겠지. 네로는 저쪽으로.

 

네로

예엡.

 

피가로

미안해. 동쪽의 섬세한 요리인 마법사인 너에게 이런 일을 맡게해서.

 

네로

아니아니... 남쪽의 가냘프고 상냥한 마법사의 부탁이면 나도 거절할 수 없는 법이라.

 

피가로

현자 님은 파낸 곳에 그럴싸한 게 없는지 봐줄래?

 

현자

알겠어요.

 

피가로

미안해. 이렇게 끌어들여서.

 

조금 미안한 듯한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진료소를 없애지 않는다는 수고를 들이기 위한, 이것은 일종의 거래다.

미틸이 진료소를 없애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던 욕망과, 형제의 앞에서는 남쪽의 마법사 피가로로 계속 있고싶다는 욕망.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조금의 무리가 필요했다.

 

미틸

좋아. 형님 시작하죠!

 

루틸

응! 시작할게!

 

미틸

《올토닉 세아르시스필체》

 

루틸

《올토닉 세토마오제》

 

히스클리프

시노, 우리도.

 

시노

그래.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블프 스노스》

 

시노

《맛차 스디파스》

 

기합을 넣은 젊은 마법사들이 각자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크고작은 제각각의 구멍이 움푹하게 지면에 파이기 시작했다. 어른들도 그에 따라 주문을 외웠다.

 

레녹스

《포세타오 메유바》

 

파우스트

《사틸크나트 물크리드》

 

네로

《아도노디스 옴니스》

 

피가로

《폿시데오》

 

주문을 외울 때마다 포크레인으로 파낸 것처럼 구멍은 점점 커지고 깊어지며, 지하로 흙이 파여간다.

마법이라고 하지만 지층을 거슬러 올라가 바위가 섞인 흙을 파내는 일은 꾸준하고 끈기가 있어야하는 작업이다.

마법사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오로지 구멍을 파는 일을 계속했다.

 

레녹스

피가로 선생님, 이 주변에는...

 

피가로

아직이야, 조금 더.

 

현자

(아직 피가로의 마법이 자연스럽게 보일 타이밍이 아닐지도 몰라)

(젊은 마법사들을 위해서라도 레녹스 일행은 빨리 작업을 끝내고 싶어하는 거겠지만...)

 

피가로의 힘을 빌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이다.

사정을 알고있는 세 사람은 말을 꺼내기 어렵겠지.

 

히스클리프

...안 보이네요.

 

현자

그러게요. 지금쯤 그럴싸해 보이는 건...

 

시노

꽤 파냈지만 정말로 이 밑에 있는건가.

 

미틸

아직 부족한가봐요... 얼마나 깊게 묻혀있는 걸까요...

 

구멍에서 올라다보는 하늘이 멀어져도 산의 늪과 함께 묻혀진 주물은 보이지 않았다.

피가로의 말대로 산의 늪이 잠든 곳은 간단하게 파낼 수 없는 깊은 장소인 듯하다.

 

피가로

다들 몸은 괜찮아? 조금은 휴식을 취하면서 해야해.

 

미틸

아직 괜찮아요! 그보다 피가로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피가로

어?

 

루틸

아까 아기를 치료하셨으니까요. 피곤하시죠?

 

피가로

...아하하. 고마워.

그래도 나도 열심히 해야지.

 

피가로가 몇 번이나 쉬라고 얘기해도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구멍을 팠다.

마법사들의 주문이 여러 번 들려온다. 남쪽의 마법사 피가로의 주문도, 작게 포개져 갔다.

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평소 온화하고 협조적인 남쪽의 마법사들 간의 충돌은 차가운 긴장감을 불러왔다.

그만큼 서로에게 양보할 수 없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고 말하며 피가로를 거부한 미틸처럼.

 

현자

(...미틸, 괜찮을까)

 

자연스레 문 쪽을 본다. 슬퍼하며 나간 그는 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현자

...죄송해요. 저, 미틸의 상태를 보러 다녀올게요.

 

네로

그럼 나도 같이 갈게.

 

현자

고마워요, 네로.

 

피가로 일행도 걱정은 되지만 우리는 미틸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에 미틸은 주저앉아 있었다. 루틸이 다가가는 와중, 시노와 히스클리프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건다.

 

미틸

저, 고집 부린 걸까요. 하지만 여기가 없어져 버린다니...

 

시노

고집이 아니야. 미틸이 장래에 일할 곳이다.

네 허가도 없이 멋대로 없애버리면 곤란하잖아.

 

히스클리프

그렇지...

나도 갑자기 블랑쉐 성을 없앤다고 들으면, 만약 나에게 결정권이 없더라도 놀라고 상처받을거라 생각해.

 

시노

그런 짓을 하게 놔둘까보냐. 주인님이 상대라해도 목숨과 바꿔서라도 저항할거다.

 

히스클리프

곧바로 목숨 걸지 마! 단순히 예시일 뿐이야.

그래도 지금의 미틸은 그런 기분을 품고있는 거지.

 

미틸

.......

 

현자

저기...

 

루틸

현자 님. 와주셨군요.

 

히스클리프

네로도.

 

시노

다른 녀석들은?

 

네로

아-- 아직 안에서 얘기하고 있어.

 

현자

미틸, 조금 진정 됐나요?

 

나를 보고 미틸은 작게 끄덕였다. 울었던 것인지, 울음을 참았던 것인지, 예쁜 녹색의 눈동자가 지금은 새빨갛게 젖어있다.

그 어깨를 루틸은 상냥하게 감싸안았다. 늘 명랑하던 형제는, 지금은 슬픈 듯 속눈썹을 내리깔고 같은 아픔을 견디고 있다.

 

미틸

어떤 사정이 있는지 자세히는 몰라요. 진료소를 포기한다는 말밖에 안 들렸거든요.

그래서 혹시 피가로 선생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모두를 위한 올바른 일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역시 싫어요.

 

미틸은 코를 훌쩍였다.

 

미틸

이런저런 방법을 시험해보고 더이상 다른 수단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이 장소를 없앤다는 방법을 가장 먼저 고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능성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방법을 시험해보고 싶어요.

저는, 저 장소를... 피가로 선생님의 진료소를, 지키고 싶어요...

피가로 선생님께서 그걸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현자

미틸...

 

시노・히스클리프

........

 

루틸

미틸, 형도 같은 생각이야. 저 장소는 울고 웃던 추억이 가득하니까.

 

미틸

...형님.

 

루틸이 미틸의 어깨를 끌어안고, 미틸은 쓸쓸한 듯이 무릎을 꼭 안았다.

피가로를 대신하듯 네로는 미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로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과 똑같이, 피가로도 여기 사는 모두를 지키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거야.

 

네로는 주변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바람이 약하게 불자 호수 위에 물결이 인다.

남쪽 나라는 자연이 험하고 개척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땅이다. 이 마을도 이렇게 생활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현자

(...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진료소 쪽을 바라보았을 때, 문득 작은 화단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꽃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꽃의 이름이 쓰여있었을 귀여운 간판이 늘어서있다.

 

히스클리프

현자 님? ...아아.

저런 곳에 화단이 있었군요.

 

현자

지금 깨달았어요. 꽃은 없는 것 같지만...

 

미틸

저건 옛날에 저희가 만든 거예요.

 

현자

그런가요?

 

루틸

네. 레노 씨에게도 도움을 받아서 흙을 옮기거나 모종을 심기도 했어요.

 

구름 사이로 빛이 비추듯이 미틸과 루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미틸

물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흙이 맞지 않았는지, 꽃이 금방 시들어버렸지만요...

피가로 선생님이 다음에 또 심자고 화단을 그대로 남겨두셨어요.

 

시노

헤에.

 

네로

그래서 간판도 그대로 남아있구나.

 

루틸

저건 미틸이 쓴 거예요. 글자를 막 배운 참이었어서 자기가 쓰겠다고 의욕이 넘쳐서.

 

히스클리프

아하하. 그렇게 작을 때 만든 거구나.

 

미틸

저, 어릴 때부터 피가로 선생님의 진료소에 자주 신세를 졌어요.

열이 내려가지 않을 때나, 몸상태가 안정되지 않을 때는 몇 번이나 여기서 지내게 해주셨던 적도 있어요.

 

현자

진료소에 입원했던 적이 있나요?

 

미틸

네. 가끔이지만요.

 

루틸

집에서 금방 나아지지 않아서 피가로 선생님께 진찰을 받으면서 한동안 지내고 있었죠.

 

미틸

그래도 괴로웠던 것뿐만 아니라, 즐거웠던 추억도 많이 있어요!

숙박회를 하면서 형님과 함께 진료소에서 묵기도 하고.

 

루틸

어릴 적에 자주 했었지. 그런 날은 다함께 밥을 해먹고 밤에는 반드시 담력시험을 하고...

귀신 역할이었던 피가로 선생님이 너무 겁을 줘서 미틸을 울렸던 적도 있었지.

 

미틸

하지만, 엄청 무서웠다구요! 찬장을 열었더니 피가로 선생님의 머리가 떠 있어서...

 

히스클리프

그, 그건 무섭네.

 

네로

너무 의욕이 들어갔잖아.

 

루틸

그때 피가로 선생님은 무척 당황하셨었지. '미안해, 괴물이 아니야'라면서 미틸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필사적으로 사과하고. 

 

미틸

레노 씨도 안심시키려 웃어줬지만 그 얼굴이 무서워서 더 울어버렸어요.

 

현자

아하하. 상상이 가요.

레녹스도 함께 담력시험을 했군요.

 

미틸

네! 양치기 일이 없을 시기에 몇 번인가 함께 진료소에 얼굴을 비춰주셨어요.

 

미틸과 루틸은 진료소에서의 추억을 아주 많이 들려주었다.

두 사람에게 얼마나 애착있는 곳인지, 그 신난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소중한 누군가와 울거나 웃거나 응석부리거나. 되돌아보면 전부 빛으로 가득 찬, 분명 보물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미틸

아직 말하기 부족할 정도로 이곳에는 추억이 가득해요.

저희에게 있어 둘도 없는 정말로 소중한 장소예요.

 

피가로

그런 일도 있었지. 그립네.

 

미틸

피가로 선생님!

 

루틸

어느새...

꽃이 뿌리내린 진료소의 랩소디~남쪽 나라&동쪽 나라~

 

피가로

지하에 묻혀있는 산의 늪은 마법사의 저주에 이끌리듯 이동하고 있어.

이 주변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게 그 증거야.

마을의 주거구역에까지 영향이 미치면 큰일이야. 늦기 전에 손을 써두는 게 좋을거라 생각해.

 

레녹스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망설이는 와중, 레녹스가 무겁게 묻는다.

 

레녹스

...그건, 이 진료소를 없앤다는 뜻입니까...?

 

피가로

그렇게 되겠네.

 

현자

그럴수가....

 

피가로

벌써 여기저기서 피해가 나오고 있어. 우물쭈물해 있을 시간이 없으니까 말야.

 

파우스트・레녹스

.......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침묵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진료소의 미래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훈훈한 실내 공기가 확 차가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피가로가 하는 말은 옳을지도 모른다. 이 이상으로 피해가 넓어지기 전에 이변을 방지하는 것이 마땅할 터.

 

현자

(...하지만)

 

이 풍경을 반갑다며 기뻐하던 루틸과, 언젠가 이 곳에서 피가로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환하게 웃으며 꿈을 이야기하던 미틸.

그리고 피가로를 의지하여 방문한 부부의 얼굴. 그들이 피가로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웃음꽃이 피던 모습이 눈꺼풀 뒷편에 떠오른다.

아주 짧은 체류 중에도 이곳이 둘도 없는 장소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현자

(그런 소중한 장소를 없앤다니...)

 

정말 괜찮을까.

이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결정해버리면 후회하지 않을까.

 

피가로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 진료소를 포기할 뿐인 거야.

 

미틸

잠시만요!

 

루틸

어떻게 된 건가요!?

 

레녹스

미틸, 루틸.

 

파우스트

너희들, 벌써 돌아온 건가?

 

히스클리프

죄송해요. 시노가 도중에 배가 고프다고 해서...

 

시노

갑자기 생각났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게.

 

네로

것보다 방금 그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야? 진료소를 포기한다니...

 

피가로

말 그대로야. 진료소는 처분하기로 했어.

 

미틸

그럴수가, 대체 왜...

 

피가로

이변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나도 이 진료소에는 애착이 있고 추억도 아주 많아.

그래도 이대로 있다간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슬퍼할지도 몰라.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하는 일이란다.

 

미틸

어, 어떻게든 없애지 않는 건 안 되나요? 여기는 저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추억이 아주 많은데...

 

미틸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동요가 느껴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피가로가 극히 차분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대답한다.

 

피가로

없애지 않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위험이 동반되고 제법 손이 많이 가.

여기는 미틸의 휴식도 겸해서 온 거니까 말이야. 의뢰는 빨리 끝내고 다같이 느긋하게 쉬고 싶잖아.

 

미틸

피가로 선생님...

 

피가로의 말을 듣고 미틸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피가로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마법사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을 없앤다는 것은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진료소도 오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잃거나 얻은 것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미틸에게 있어서는 어릴 적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장소이고, 방금 전까지도 다같이 평화롭게 지내던 곳이다.

그런 장소를 갑자기 없앤다고 들으면 망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의 눈동자에서 슬픔과 반발심이 느껴졌다.

 

미틸

게다가... 제가 장래에 약사가 되면 여기서 일하게 해주신다고, 아까...

 

피가로

...미틸. 너는 현명하니까 알겠지?

 

미틸

.......

모르겠어요.

 

무척 슬픈 듯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미틸은 고개를 저었다.

 

미틸

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알고싶지 않아요...!

 

시노・히스클리프

미틸!

 

루틸

잠깐만, 미틸.

죄송해요, 진료소에 관한 건 선생님께서 결정하실 일인데. 하지만 미틸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미틸을 쫓아 세 명이 달려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잠시 동안 진료소는 조용해졌다.

 

피가로

...납득하지 못한 걸까. 역시 남쪽의 젊은 마법사는 토지에 집착이 있네.

 

레녹스

지금은 당신도 남쪽의 마법사입니다.

 

레녹스가 낮은 목소리로 던졌다. 한숨을 내쉬는 듯한 태도에 피가로가 천천히 그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레녹스

저도 미틸과 같은 의견입니다.

 

현자

레녹스...

 

피가로

뭐야. 레녹스까지 반대하는 거야?

 

레녹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나서 포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요.

 

피가로

시간이 있다면 쓸데없는 일이나 수고가 들어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고.

다소의 희생은 따르기 마련이야. 수수방관한 채 나무를 시들게 할 바에, 난 차라리 병든 가지를 꺾을거야.

 

레녹스

가지도 아픔을 느낍니다. 그 가지에 앉아 쉬는 작은 새들도 있을 거고요.

이런 일을 반복하니까 잃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게 아닙니까. 저는 당신처럼 딱 잘라버리진 못합니다.

 

레녹스의 목소리는 조용하고도 반항적이었다.

 

피가로

너도 제법 잘 말하는구나.

 

그에 비해 피가로는 싫증난 왕자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가 흐른다.

 

네로

...저기 말야, 잘은 모르겠지만 수단은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거야?

 

네로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파우스트에게로 모인다.

레녹스는 파우스트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레녹스

파우스트 님. 달리 저주를 없앨 방법은 없을까요.

 

조금 생각에 잠긴 뒤, 파우스트는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

.......

없는 건 아냐.

우선 당시 산의 늪과 그 마법사를 묻은 현장으로 가서, 그 토지를 파내고 원흉이 된 물건을 찾는다.

피가로는 무언가에 원한이 깃들었다고 말했지만, 아마 마법사가 지녔던 물건이나 마도구가 원인이겠지. 별로 좋은 물건은 아닐거다.

주물이 된 그걸 찾아서 정화하면 이변을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몰라.

 

현자

정말인가요...!?

 

희망이 보여 그 순간 가슴이 북받쳤다. 하지만 피가로의 한숨이 그것을 싹 지워버렸다.

 

피가로

지상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산의 늪은 상당히 깊은 지하에 묻었어. 주물을 찾는다면 엄청난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해.

그럴 동안에도 저주가 산의 늪을 이끌고 마을로 오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

보아하니 앞으로 남은 건 이틀 정도야.

주물이 나올 가능성은 낮고, 애초에 발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레녹스

.......

 

모두에게 설명하면서도 피가로의 눈은 레녹스를 향하고 있다.

 

현자

(...설마 이 두 사람이 대립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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